[유적지]제주의 심장, 제주목 관아
[유적지]제주의 심장, 제주목 관아
by 원지애 기자 2012.10.29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자면 제주목 관아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다 . 관덕정 버스 정류장을 수없이 이용하고 지하상가를 수없이 들락날락 거려봤어도 제주목 관아 외대문 (* 제주목 관아 건물로 통하는 영문의 대문루 ) 안으로 들어가 볼 생각은 못해봤다 . 그저 외대문 안에는 뭐가 있을까라는 궁금함만 늘 있었을 뿐 .
그 궁금함 때문이었을까 . 따사로운 가을 햇볕이 드는 오후 내 발걸음은 어느새 제주목 관아로 향하고 있었다 .
사적 제 380 호로 지정된 제주목 관아는 조선시대 제주지방 정치 · 행정 · 문화의 중심지였다 . 제주목 관아는 지금의 관덕정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에 분포해 있었으며 , 이미 탐라국 시대부터 성주청등 주요 관아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
제주도내 행정을 총괄하던 제주목 소속의 관아가 즐비하게 들어섰던 곳
관아시설은 1423 년 ( 세종 16) 관부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진 뒤 바로 시작해 골격이 이뤄지고 조선시대 내내 증 · 개측이 이뤄졌지만 , 일제강점기 때 집중적으로 훼철돼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제주목 관아는 1991 년부터 본격적인 발굴 · 정비사업에 들어가 1993 년에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고 , 발굴조사로 초석과 기단석을 확인하고 1999 년부터 복원을 시작해 2002 년에 1 차 복원이 완료됐다 .
외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어느 곳보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온 몸을 감싸며 손님을 반긴다 . 우련당 (* 연회를 베풀고 공물을 봉진하였던 공간 ) 연희각 (* 제주목사의 집무처로 제주도의 안위를 책임지는 공간 ), 홍화각 (* 절제사의 영청으로 사용하던 공간 ), 영주협당 (* 목사를 보좌하는 군관들이 근무하던 관청 ), 귤림당 (* 제주목사가 고즈넉한 여유를 만끽하는 장소 ), 망경루 (* 임금님의 은덕을 기리는 공간인 동시에 제주 앞바다로 침범하는 왜구를 감시하는 망루 역할 ) 등이 철저한 고증을 통해 복원이 이뤄진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
과거였다면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이곳 , 지금은 햇살이 관아를 가득 채울 뿐 고요하기까지 했다 .
제주의 대표적 누정 ‘ 관덕정 ’
그 궁금함 때문이었을까 . 따사로운 가을 햇볕이 드는 오후 내 발걸음은 어느새 제주목 관아로 향하고 있었다 .
사적 제 380 호로 지정된 제주목 관아는 조선시대 제주지방 정치 · 행정 · 문화의 중심지였다 . 제주목 관아는 지금의 관덕정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에 분포해 있었으며 , 이미 탐라국 시대부터 성주청등 주요 관아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
제주도내 행정을 총괄하던 제주목 소속의 관아가 즐비하게 들어섰던 곳
관아시설은 1423 년 ( 세종 16) 관부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진 뒤 바로 시작해 골격이 이뤄지고 조선시대 내내 증 · 개측이 이뤄졌지만 , 일제강점기 때 집중적으로 훼철돼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제주목 관아는 1991 년부터 본격적인 발굴 · 정비사업에 들어가 1993 년에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고 , 발굴조사로 초석과 기단석을 확인하고 1999 년부터 복원을 시작해 2002 년에 1 차 복원이 완료됐다 .
외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어느 곳보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온 몸을 감싸며 손님을 반긴다 . 우련당 (* 연회를 베풀고 공물을 봉진하였던 공간 ) 연희각 (* 제주목사의 집무처로 제주도의 안위를 책임지는 공간 ), 홍화각 (* 절제사의 영청으로 사용하던 공간 ), 영주협당 (* 목사를 보좌하는 군관들이 근무하던 관청 ), 귤림당 (* 제주목사가 고즈넉한 여유를 만끽하는 장소 ), 망경루 (* 임금님의 은덕을 기리는 공간인 동시에 제주 앞바다로 침범하는 왜구를 감시하는 망루 역할 ) 등이 철저한 고증을 통해 복원이 이뤄진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
과거였다면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이곳 , 지금은 햇살이 관아를 가득 채울 뿐 고요하기까지 했다 .
제주의 대표적 누정 ‘ 관덕정 ’
제주목 관아 앞에있는 관덕정은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다 . 조선초기의 건축물로 1448 년 ( 세종 30) 병사 훈련 및 무예수련장으로 사용하기위해 창건된 곳이다 . ‘ 관덕 ’ 이란 명칭은 “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쌓는 것이다 ” 라는 ‘ 예기 ’ 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
관덕정 앞마당은 과거 제주에서 큰 행사와 각종 기념식이 열리던 곳이었다 .
매년 입춘 때만다 ‘ 탐라국 입춘굿놀이 ’ 가 치러졌으며 , 진상용 말을 점검하기도 했고 , 과거가 치러지기도 했다 . 제주에서 최초로 5 일장이 열렸고 , 이재수의 난이 일어났을 때 분노한 군중이 천주교도들에게 보복을 자행했던 곳도 여기다 . 4·3 사건이라는 엄청난 사태를 불러일으킨 1947 년 3 월 1 일의 삼일절 행사가 열린 곳도 이 관덕정 앞마당이었다 .
이처럼 제주목관아지 일대는 5 세기 이전 탐라국의 중심 마을이 들어선 뒤 , 고려 · 조선시대를 거쳐 1950 년대 이전에 이르기까지 제주사회 최대 규모의 중심 마을이 유지되어왔었다 . 또한 선사시대로부터 근 ·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사회의 형성과 변천을 엿볼 수 있는 역사유적도 도처에 산재해 있다 .
발길을 제주목 관아로 돌려 외대문을 열고 관아로 들어가 보자 . 그 곳에 우리 제주의 역사가 있다 .
관덕정 앞마당은 과거 제주에서 큰 행사와 각종 기념식이 열리던 곳이었다 .
매년 입춘 때만다 ‘ 탐라국 입춘굿놀이 ’ 가 치러졌으며 , 진상용 말을 점검하기도 했고 , 과거가 치러지기도 했다 . 제주에서 최초로 5 일장이 열렸고 , 이재수의 난이 일어났을 때 분노한 군중이 천주교도들에게 보복을 자행했던 곳도 여기다 . 4·3 사건이라는 엄청난 사태를 불러일으킨 1947 년 3 월 1 일의 삼일절 행사가 열린 곳도 이 관덕정 앞마당이었다 .
이처럼 제주목관아지 일대는 5 세기 이전 탐라국의 중심 마을이 들어선 뒤 , 고려 · 조선시대를 거쳐 1950 년대 이전에 이르기까지 제주사회 최대 규모의 중심 마을이 유지되어왔었다 . 또한 선사시대로부터 근 ·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사회의 형성과 변천을 엿볼 수 있는 역사유적도 도처에 산재해 있다 .
발길을 제주목 관아로 돌려 외대문을 열고 관아로 들어가 보자 . 그 곳에 우리 제주의 역사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