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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고씨 부인의 절개를 기린 ‘절부암’

[유적지]고씨 부인의 절개를 기린 ‘절부암’

by 조아라 기자 2014.12.03

애절한 사랑과 그 사랑을 지켜주는 사람들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포구 옆 나무가 무성한 언덕에는 ' 열부 고씨의 절개를 기리기 위한 곳 ' 인 ' 절부암 ' 이 자리해 있다 .

현재 제주 전역에 분포하는 효자비는 32 기 , 열녀비는 40 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 보통 이러한 비석들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 비석거리 ' 에 비석으로 세워진 것이 일반적이지만 , ' 절부암 ' 은 ' 석각 ( 石刻 ) 으로 전해지고 있다 .
' 절부암 ' 은 한경면 용수리 포구의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지만 , 시원스럽게 보이는 차귀도의 빼어난 경관과 지난 160 여 년 간 절부 고씨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지면서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사로잡는 곳이다 .

지난 1981 년 8 월 26 일 , 제주도 기념물 제 9 호로 지정된 ' 절부암 ' 은 고기잡이를 나간 남편이 조난을 당해 부인이 남편의 시신을 찾아 헤매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슬픈 사연이 전해져 오는 곳이다 .

전해져 오는 전설에 따르면 , 지금으로 부터 160 여 년 전 중문 하원리 출신의 고응추 ( 高應秋 ) 와 서귀포 하원동 출신의 강성일 ( 康聖一 ) 은 조상 때부터 알고 지내던 집안으로 각 집안의 늦둥이인 고씨네 딸과 강씨네 아들은 1853 년 혼인을 하게 됐다 .
젊은 부부는 비록 가난했지만 , 가난한 또한 감사히 여기며 고기잡이 , 품팔이 등을 하며 부지런히 생활했다 .

결혼한 그 해 11 월 , 남편은 마을 사람들과 같이 ' 테우 ' 를 타고 차귀도에 대나무를 베러 갔다가 대나무를 가득 싣고 귀항도중 급류를 만나 변을 당하게 되고 , 같이 같던 마을 사람들은 모두 시신이 떠올랐지만 , 남편의 시신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
이에 고씨 부인은 ' 엄수개 ( 한경면 판포리 )' 에서 지금의 고산리까지 해안선을 발에 피가 나도록 남편의 시신을 찾아 다녔지만 찾지 못하고 결국 이틀 째되던 날 밤 소복을 하고 지금의 절부암에 있는 후박나무에 스스로 목을 매어 남편의 뒤를 따르게 된다 .

그런데 고씨가 자결한 3 일 후 , 남편인 강씨의 시신이 고씨 부인이 목을 맨 ' 엉덕동산 ' 아래에 떠오르게 되고 , 마을사람들은 둘을 가엾게 여겨 당산 아래에 합장을 하게 된다 .
현재 당산 아래에는 홀로 서 있는 높이 132cm, 너비 42~46cm. 비교적 규모가 큰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 이 비석에는 절부가 세상을 뜨고 14 년이 지나서 제주판관인 신재우가 비문을 짓고 세운 것으로 기록돼 있다 .

판관 신재우는 무슨 인연일까 ?

신재우 (1840~1903) 는 현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 태생으로 상경해 과거에 급제한 인물로 그가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

꿈에 소복한 여인이 나타나 하소연을 할 듯하다 사라진 것이 이상해 해몽을 의뢰하게 되고 , 점술가는 " 그 여인의 넋을 달래주면 좋은 일이 있을 것 " 이라고 말해준다 . 이에 문득 고씨 부인의 이야기가 떠올라 제물을 올리고 제사를 지냈더니 그는 상경해 과거에 급제하게 된 것이다 .

그런데 절부 고씨와 신재우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

과거에 급제해 제주로 배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 풍파가 심해 진도에 피항해 정박을 하게 됐는데 , 그날 밤 꿈에 고씨 부인이 나타나 “ 첫닭이 울거든 서둘러 배를 띄워 떠나시오 ” 라는 말에 선원들을 깨우고 출발을 독촉해 다른 일행보다 먼저 제주를 향하게 되고 , 돌풍을 피할 수 었었다 . 이에 절부 고씨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신재우가 절부 고씨의 비문을 짓고 , 비석을 세우고 , 봉분을 단장했다는 전설 속의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지금도 마을에서는 이들 부부의 넋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음력 3 월 15 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

조아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