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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그 날의 출정을 바라보며 - 해병혼탑

[유적지]그 날의 출정을 바라보며 - 해병혼탑

by 김동일 2008.07.31

제주시 동문로터리 중심부에는 이방인들의 눈길을 끄는 탑이 서있다. 로터리 중심부에 하늘을 찌를 듯이 하얀 색으로 서 있는 이 탑의 이름은 ‘해병혼탑’이다. 6.25에 참전했다가 산화한 영혼들을 추모하고자 세운 탑이다.
매년 9월 1일 제주시내 시가지에서는 해병전우회 주관으로 장갑차들이 등장하는 시가행진을 벌인다. 작년 국군의 날 하루 전에는 제주항공에서 승무원들이 해병대 군복을 입고 기내 서비스를 하는 이벤트를 벌였다. 작년 9월 태풍 나리가 제주를 초토화 시켰을 때 빨간 명찰을 단 1,300여명의 해병대원들이 구축함과 상륙정을 이끌고 구조대로 달려왔다. 이처럼 제주에는 해병대와의 인연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많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해병대는 제주에서 자라고 컸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제주도 청년들이 군대를 갈 경우 선택의 여지가 없이 당연히 해병대로 입대하는 시기가 있었을 정도였고, 오늘의 해병은 제주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정도로 제주도는 해병대의 고향이다.

해병대는 49년 초에 진주의 허름한 비행기 격납고에서 380여명으로 창설되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해병대의 전통은 탄생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병대를 키운 것은 제주도였다. 49년 12월에 해병대 주둔지가 제주도로 바뀌었다. 해병의 임무는 4.3으로 피폐해진 민심의 위무와 잔여공비의 소탕이었지만 첫 번째 주임무는 해병대 정신을 고양하는 훈련이었다. 바로 해병대의 불굴의 정신은 한라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것이었다. 해병대는 6.25 당시에 제주도에서 갈고 딱은 그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6.25가 발발하고 낙동강 전선으로 몰리며 국가가 누란지위의 위기에 몰렸을 때 제주의 젊은이들이 국가를 구하기 위하여 분연히 일어서서 해병대로 몰려들었다. 3천여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이 바로 해병대 3, 4기 기수들이고, 이들은 곧바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여 중앙청에 태극기를 꼽는 활약을 펼쳤으며, 도솔산 전투 김일성 고지 등에서 험난한 전투 속에 빛나는 승리를 거둠으로서 해병대는 꺼져가는 조국의 생명을 구하는 구국의 횃불이 되고, 무적해병이라는 해병대 신화가 탄생하게 된다.

6.25에 자원 참전했던 해병대 3, 4기는 앳된 중, 고등학생들이 많았고, 이들 중에는 형제들도 있었고 스승과 제자들도 있었다. 3기는 한 달여간의 훈련만을 거치고, 그리고 4기는 입대 이틀 만에 전쟁터로 떠나는 수송선에 올랐다. 그만큼 나라의 정세가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할 때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송선 갑판에서 기본적인 훈련만을 거치고 부산을 거쳐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 그래서 그들의 무기는 오로지 ‘깡’과 ‘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부터 10여 년 후 6.25에 참전했다가 ‘돌아오지 않는 용사’들을 위하여 1960년 4월 지금의 자리에 약 10여m의 높이로 해병혼탑이 세워졌다. 그 자리는 그 때 그 뜨거운 피를 가졌던 청춘들이 출병식을 가졌던 자리이고, 해병혼탑은 그 젊은이들이 떠나가던 북쪽의 항구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이 떠나던 날이 9월 1일이고 그날은 ‘제주도 해병의 날’로 지정된 날이다. 그 날이 되면 거리에는 장갑차와 상륙정이 등장하는 시가행진이 벌어지는 것이다.

해병대는 진해에서 탄생했지만 오늘의 해병대를 만든 것은 제주의 바람과 파도와 한라산이었고, 그리고 제주도의 청년들이었다. 지금의 해병대는 제주의 아들이고 제주의 자랑이다. 그리고 해병대는 제주도의 훌륭한 관광자원이고 문화유산이 될 수 있다. 해병대의 시가행진을 삐딱한 사시로 쳐다보는 일부 ‘찌찔이들’만 없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