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5.16도로-1
[드라이브]5.16도로-1
by 김동일 2008.07.31
5.16도로는 제주시와 서귀포를 연결하는 가장 빠른 도로로서, 제주시에서 출발하여 한라산 동쪽 허리 800여 고지를 넘어서 서귀포로 이어지는 약 45km의 도로이다. 5.16도로는 현재까지도 제주시와 서귀포를 잇는 가장 빠른 도로의 지위를 지키고 있고,
5.16도로를 주행해본 사람들은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서 5.16도로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도로 명칭으로 인해 일부에서 정치적 공격을 하기도 하고 도로 명칭을 바꾸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것은 이 도로에 대한 무지나 오해에서 나온 주장이다. 일부에서 5.16도로가 '5.16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거나 '국토재건단을 동원해 만들었다'고 오해하는 것이 그것인데, 그런 것과는 관련이 없고 5.16도로의 명칭은 공모를 통해 뽑힌 명칭으로서 5.16도로의 명칭은 제주도민들이 붙인 이름이다. 애초의 명칭은 '제주시 서귀포 횡단도로'로 불려졌고, 나중에 만들어진 제2횡단도로와 구별하기 위해서 '제1횡단도로'로 불려지기도 했다.
5.16혁명이 일어나면서 제주도에는 김영관 해군준장이 12대 지사로 임명되었다. 김 지사가 제주에 왔을 때 제주는 거지 도둑 대문이 없는 삼무의 섬이 아니라 길과 물과 먹을 것이 없는 삼무의 섬이었다. 무인(武人)도지사는 4.3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제주의 '재건'을 슬로건으로 내세웠고, 5.16도로는 길의 혁명, 물의 혁명으로 이어지는 제주도 혁명의 시발점이었다.
김 지사는 박정희 의장이 초도순시했을 때 의도적으로 박정희 의장을 며칠 동안 제주에 머물게 하는 '작전'을 실행하여 박정희 의장을 제주도의 든든한 후원자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무인 지도자와 무인 도지사가 이처럼 제주도에 애정을 가졌던 이유는 4.3의 위무라는 목적도 있었지만 제주도의 숨겨진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이유도 있었다. 두 사람이 제주에 반해 제주의 미래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된 사실은 제주도로서는 축복이었다.
제주시에서 한라산을 넘어 서귀포로 가는 중턱에는 1930년대에 만들었던 길이 있었는데 5.16도로는 이 길을 기초로 계획되었다. 계획 당시 조사에 의하면 견월악까지는 겨우 차량이 진입할 수 있었고, 성판악까지는 소로길의 형태만 남아있었다. 성판악부터 서귀포 방면으로는 수풀이 우거져 도로의 형태도 남아있지 않은 형편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5.16도로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로는 재정이나 장비가 열악한 시대였고, 제주도 내에 포장도로는 전무한 상태였기에 횡단도로보다는 일주도로 포장이 급선무라는 주장도 있었다. 더욱이 당시에 국도의 포장 지원에는 1일 통행 차량대수가 800여대가 넘어야 하는 조건이 있었는데 당시 제주의 사정은 차량 보유대수를 합쳐도 300대가 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5.16도로를 주행해본 사람들은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서 5.16도로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도로 명칭으로 인해 일부에서 정치적 공격을 하기도 하고 도로 명칭을 바꾸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것은 이 도로에 대한 무지나 오해에서 나온 주장이다. 일부에서 5.16도로가 '5.16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거나 '국토재건단을 동원해 만들었다'고 오해하는 것이 그것인데, 그런 것과는 관련이 없고 5.16도로의 명칭은 공모를 통해 뽑힌 명칭으로서 5.16도로의 명칭은 제주도민들이 붙인 이름이다. 애초의 명칭은 '제주시 서귀포 횡단도로'로 불려졌고, 나중에 만들어진 제2횡단도로와 구별하기 위해서 '제1횡단도로'로 불려지기도 했다.
5.16혁명이 일어나면서 제주도에는 김영관 해군준장이 12대 지사로 임명되었다. 김 지사가 제주에 왔을 때 제주는 거지 도둑 대문이 없는 삼무의 섬이 아니라 길과 물과 먹을 것이 없는 삼무의 섬이었다. 무인(武人)도지사는 4.3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제주의 '재건'을 슬로건으로 내세웠고, 5.16도로는 길의 혁명, 물의 혁명으로 이어지는 제주도 혁명의 시발점이었다.
김 지사는 박정희 의장이 초도순시했을 때 의도적으로 박정희 의장을 며칠 동안 제주에 머물게 하는 '작전'을 실행하여 박정희 의장을 제주도의 든든한 후원자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무인 지도자와 무인 도지사가 이처럼 제주도에 애정을 가졌던 이유는 4.3의 위무라는 목적도 있었지만 제주도의 숨겨진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이유도 있었다. 두 사람이 제주에 반해 제주의 미래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된 사실은 제주도로서는 축복이었다.
제주시에서 한라산을 넘어 서귀포로 가는 중턱에는 1930년대에 만들었던 길이 있었는데 5.16도로는 이 길을 기초로 계획되었다. 계획 당시 조사에 의하면 견월악까지는 겨우 차량이 진입할 수 있었고, 성판악까지는 소로길의 형태만 남아있었다. 성판악부터 서귀포 방면으로는 수풀이 우거져 도로의 형태도 남아있지 않은 형편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5.16도로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로는 재정이나 장비가 열악한 시대였고, 제주도 내에 포장도로는 전무한 상태였기에 횡단도로보다는 일주도로 포장이 급선무라는 주장도 있었다. 더욱이 당시에 국도의 포장 지원에는 1일 통행 차량대수가 800여대가 넘어야 하는 조건이 있었는데 당시 제주의 사정은 차량 보유대수를 합쳐도 300대가 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5.16도로가 먼저 건설되었던 이유는 일주도로 포장은 가난한 시대의 재정 탓으로 완전 포장까지에는 상당한 세월이 필요하다는 이유도 있었고, 당시 제주시와 서귀포의 왕래에는 제주도의 일주도로를 따라 둘러가야 했기에 차량으로도 5~6시간이 걸려야 했지만 횡단도로의 건설로 1시간 전후로 단축할 수 있었다. 그리고 횡단도로 건설은 투자 대비 효용이 컸고, 제주도의 지리적 여건상 제주시와 서귀포 간의 직통도로가 여실히 필요한 시점이었다. 5.16도로가 제주도의 막힌 숨통을 틔어주고 대동맥 역할을 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었고, 여기에 김영관 지사의 추진력과 박정희 의장의 후원은 5.16도로의 산파역을 했다.
중앙정부의 압도적 지원 때문에 다른 지방의 질투와 견제 속에서 지금의 제주시청 앞에서 5.16도로의 기공식이 열렸다. 그 때가 1962년 3월 24일이었다.
중앙정부의 압도적 지원 때문에 다른 지방의 질투와 견제 속에서 지금의 제주시청 앞에서 5.16도로의 기공식이 열렸다. 그 때가 1962년 3월 24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