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신성한 숲, ‘산천단’
[유적지]신성한 숲, ‘산천단’
by 원지애 기자 2012.09.17
제주시 아라동 제주대학교 후문 맞은편 , 소산오름을 전면으로 한 여름에도 햇볕이 들어오지 못할 정도의 울창한 숲이 있다 .
거대한 곰솔 8 그루가 숲 주변을 지키고 숲 중앙에는 제단과 비각이 자리를 잡은 이 곳이 1470 년부터 지금까지 산신제를 지내고 있는 ‘ 산천단 ’ 이다 .
산천단은 고려시대부터 한라산 정상에서 치러오던 산신제로 인하여 주물을 지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얼어죽거나 부상을 당하는 등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 날씨로 인해 올라갈 수 없는 날이 많아지자 1470 년 이약동 목사가 산천단에 제단을 마련 지금까지 산신제를 지내는 곳이다 .
전통 산악신앙과 산천단
산악신앙은 모든 자연물에 정령이 있고 , 그에 의하여 생성이 가능하다고 믿는 애○○○즘에 기원을 둔다 . 산악숭배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 그 하나는 산 자체를 인격화해 그 양감 · 위엄 · 수려 · 운무 , 접근 곤란 , 등산의 위험 , 암석의 낙하 , 기묘한 소리 , 메아리 , 화산폭발 등을 두려워하고 숭배하는 일이다 . 또 다른 하나는 산에 있다고 믿어지는 신령 , 즉 산신에 대한 공포감에서이다 .
선조들은 하늘과 인간의 교섭처로 높은 산을 숭배하였고 또 그 우두머리는 산신이 되어 나라와 마을의 수호신이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 따라서 산천단은 산악숭배의 믿음에서 출발한 신성한 장소일 뿐만 아니라 그곳에 심겨진 신수 ( 神樹 ) 는 한라산신과의 교섭처로써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제의공간으로서의 산천단
이곳 산천단은 예부터 산천제를 비롯하여 여러 제사를 봉행했던 유서깊은 곳이다 . 1470 년 목사 이익동이 세운 한라산신묘를 비롯하여 농사의 재해예방을 기원하는 포신묘가 있었으며 가뭄이 심할 때는 기우제를 올리던 터 가 있는 곳이다 .
산천단에는 여러개의 비각이 있는데 , 거기에서 제사의식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
2 개의 표지석에는 “ 이곳은 예로부터 산천제를 비롯하여 여러 제사를 봉행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 “ 성조 1 년 (1470) 이약동 제주목사가 한라산산신묘를 세웠다 . 산정상에서 매번 제사를 지냈는데 , 많은 사람들이 동사했다 . 그래서 제주 남쪽 작은 산 아래에 묘단을 건립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 라고 쓰여있다 .
제주도 산천단을 비롯하여 전국에 산재했던 산천단표는 초기 국가시대에는 신전으로 종교적 공간이었으나 추후 기능이 축소되어 토속 민간신앙으로 전승됐다 . 하지만 아쉽게도 정작 국내에서는 제천신앙과 관련해 숲이 조성된 곳의 유적이나 유구는 드물 뿐 아니라 알려진 것조차도 매우 희소하다 .
제주 산천단 또한 종교적 · 신화적 · 상징적 가치는 물론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다양한 측면에서의 연구 및 조사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
600 여년 동안 제단을 지키는 ‘ 곰솔 ’
거대한 곰솔 8 그루가 숲 주변을 지키고 숲 중앙에는 제단과 비각이 자리를 잡은 이 곳이 1470 년부터 지금까지 산신제를 지내고 있는 ‘ 산천단 ’ 이다 .
산천단은 고려시대부터 한라산 정상에서 치러오던 산신제로 인하여 주물을 지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얼어죽거나 부상을 당하는 등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 날씨로 인해 올라갈 수 없는 날이 많아지자 1470 년 이약동 목사가 산천단에 제단을 마련 지금까지 산신제를 지내는 곳이다 .
전통 산악신앙과 산천단
산악신앙은 모든 자연물에 정령이 있고 , 그에 의하여 생성이 가능하다고 믿는 애○○○즘에 기원을 둔다 . 산악숭배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 그 하나는 산 자체를 인격화해 그 양감 · 위엄 · 수려 · 운무 , 접근 곤란 , 등산의 위험 , 암석의 낙하 , 기묘한 소리 , 메아리 , 화산폭발 등을 두려워하고 숭배하는 일이다 . 또 다른 하나는 산에 있다고 믿어지는 신령 , 즉 산신에 대한 공포감에서이다 .
선조들은 하늘과 인간의 교섭처로 높은 산을 숭배하였고 또 그 우두머리는 산신이 되어 나라와 마을의 수호신이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 따라서 산천단은 산악숭배의 믿음에서 출발한 신성한 장소일 뿐만 아니라 그곳에 심겨진 신수 ( 神樹 ) 는 한라산신과의 교섭처로써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제의공간으로서의 산천단
이곳 산천단은 예부터 산천제를 비롯하여 여러 제사를 봉행했던 유서깊은 곳이다 . 1470 년 목사 이익동이 세운 한라산신묘를 비롯하여 농사의 재해예방을 기원하는 포신묘가 있었으며 가뭄이 심할 때는 기우제를 올리던 터 가 있는 곳이다 .
산천단에는 여러개의 비각이 있는데 , 거기에서 제사의식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
2 개의 표지석에는 “ 이곳은 예로부터 산천제를 비롯하여 여러 제사를 봉행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 “ 성조 1 년 (1470) 이약동 제주목사가 한라산산신묘를 세웠다 . 산정상에서 매번 제사를 지냈는데 , 많은 사람들이 동사했다 . 그래서 제주 남쪽 작은 산 아래에 묘단을 건립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 라고 쓰여있다 .
제주도 산천단을 비롯하여 전국에 산재했던 산천단표는 초기 국가시대에는 신전으로 종교적 공간이었으나 추후 기능이 축소되어 토속 민간신앙으로 전승됐다 . 하지만 아쉽게도 정작 국내에서는 제천신앙과 관련해 숲이 조성된 곳의 유적이나 유구는 드물 뿐 아니라 알려진 것조차도 매우 희소하다 .
제주 산천단 또한 종교적 · 신화적 · 상징적 가치는 물론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다양한 측면에서의 연구 및 조사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
600 여년 동안 제단을 지키는 ‘ 곰솔 ’
산천단 입구와 제단 주위에는 천연기념물 160 호로 지정되어 있는 곰솔이 있는데 , 우리나라 곰솔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나무로 알려져 있으며 전부 8 그루로 키가 19~22m, 가슴높이의 둘레 3~6m 로 수령이 500~600 년으로 추정된다 .
산천단 곰솔들이 지금까지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한라산신제의 배후림이자 방풍림이며 녹음수로써 끊임없는 보살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
오래전부터 제주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신성한 곳이기 때문일까 .
산천단에서 맞이한 가을은 그 어느해의 가을보다 시원했으며 포근했다 .
2012 년 가을 , 8 그루의 곰솔은 여전히 산천단을 지켜주고있었다 .
산천단 곰솔들이 지금까지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한라산신제의 배후림이자 방풍림이며 녹음수로써 끊임없는 보살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
오래전부터 제주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신성한 곳이기 때문일까 .
산천단에서 맞이한 가을은 그 어느해의 가을보다 시원했으며 포근했다 .
2012 년 가을 , 8 그루의 곰솔은 여전히 산천단을 지켜주고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