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다섯 명현(名賢)을 만나다
[유적지]다섯 명현(名賢)을 만나다
by 원지애 기자 2012.11.05
지난 주 답사했던 제주목 관아에서 동문시장을 가로 질어 15 분쯤 걸어가다 보면 찾아가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려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띄지않은 소박한 모습의 ‘ 오현단 ( 五賢檀 )’ 이 도로옆에 자리하고 있다 .
돌비석에 씌여진 ‘ 오현단 ’ 이라는 글자를 보고서야 입구임을 알고 들어가게 된다 .
2 층 건물로 이뤄진 제주 향로당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크고 작은 비석들이 눈에 띄고 울창한 나무 몇 그루가 눈에 띈다 .
오현단은 제주도 제주시 이도 1 동 1421 번지에 위치한 오현 ( 五賢 ) 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제단 ( 祭壇 ) 으로 현재 제주도 기념물 제 1 호로 지정돼있다 .
1871 년 ( 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귤림서원 ( 橘林書院 ) 이 훼철된 후 , 1892 년 ( 고종 29) 제주 유림들의 건의에 의해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던 오현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제단이다 .
귤림서원은 1578 년 ( 선조 11) 조인후 판관이 1521 년 ( 중종 16) 10 월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된 김정 ( 金淨 ) 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그의 적거지에 충암사 ( 沖庵祠 ) 를 세운 데서 비롯되었다 .
돌비석에 씌여진 ‘ 오현단 ’ 이라는 글자를 보고서야 입구임을 알고 들어가게 된다 .
2 층 건물로 이뤄진 제주 향로당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크고 작은 비석들이 눈에 띄고 울창한 나무 몇 그루가 눈에 띈다 .
오현단은 제주도 제주시 이도 1 동 1421 번지에 위치한 오현 ( 五賢 ) 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제단 ( 祭壇 ) 으로 현재 제주도 기념물 제 1 호로 지정돼있다 .
1871 년 ( 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귤림서원 ( 橘林書院 ) 이 훼철된 후 , 1892 년 ( 고종 29) 제주 유림들의 건의에 의해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던 오현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제단이다 .
귤림서원은 1578 년 ( 선조 11) 조인후 판관이 1521 년 ( 중종 16) 10 월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된 김정 ( 金淨 ) 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그의 적거지에 충암사 ( 沖庵祠 ) 를 세운 데서 비롯되었다 .
이곳에는 지금도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 ( 俎豆石 ) 이 놓여 있다 .
나무아래 자리잡은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은 다섯 명현 ( 名賢 ) 을 모시기에는 다소 왜소해보였지만 오히려 화려하지 않고 , 인위적이지 않은 , 투박하지만 진심이 담겨있는 제주인의 모습과도 닮아보였다 .
제주도민에게 익숙한 오현중 · 고등학교의 ‘ 오현 ( 五賢 )’ 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 학교는 1972 년 까지 이곳 오현단에 자리 잡고 있다가 화북으로 이전했다 .
다섯 명현은 과연 누구길래 이렇게 제단까지 만들며 모시게됐을까 .
오현은 1520 년 유배온 충암 김정 선생 ( 조광조와 개혁정치로 기묘사회에 연루되어 유배됨 ), 규암 송인수 선생 (1534 년 김안로에 반대해 제주 목사로 좌천당해 옴 ), 청음 김상헌 선생 (1601 년 제주에서 역모를 꾀한 사건 조사를 위해 안무어사로 부임 ), 동계 정온 선생 (1614 년 영창대군의 죽음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려 유배됨 ), 우암 송시열 선생 (1689 년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자 이에 반대 상소를 올려 유배됨 ) 등 다섯 분이다 .
유적 내에는 오현의 유적으로 철종 7 년 (1856) 판관 홍경섭이 새긴 송시열 선생의 ‘ 증주벽립 마애명과 충암 김정 선생과 우암 송시열 선생의 ‘ 적려유허비 ’ ‘ 귤림서원묘정비 ’, 향현사유허비 등이 함께 세워져있다 .
그리고 오현의 시 한구절을 적은 시비도 세워져있는데 , 시 한구절 한구절에 담긴 오현의 심정이 가슴에 와 닿는다 .
바다 넘어 멀고도 먼 변방의 섬 제주 .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였을까 .
충암 김정은 유배당시 보고 느낀 제주의 상황과 지형과 문화 , 생활상 , 자기의 심정등의 기록을 남기게 되는데 이 책이 바로 ‘ 제주풍토록 ’ 이다 . 제주의 유배생활 1 년을 넘기고 충암 나이 36 세 유배지를 벗어났다는 죄목으로 그는 사약을 받게되는데 사약을 받아놓고 마지막 시 한수를 남긴다 . 이 마지막 시가 ‘ 임절시 ’ 이다 .
충암 김정 - 임절사 ( 臨蕝辭 )
외딴섬에 버려져 외로운 넋이 되려하니
어머님 두고감이 천륜을 어기었네
이 세상을 만나서 나의 목숨 마쳐도
구름을 타고가면 하늘문에 이르리
굴원을 따라 떠돌고도 싶으나
기나긴 어두운 밤 언제면 날이 새리
빛나던 일편단심 쑥밭에 묻게되면
당당하고 장하던 뜻 중도에서 꺽임이니
아 ~ 천추만세에 내 슬픔을 알리라
나무아래 자리잡은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은 다섯 명현 ( 名賢 ) 을 모시기에는 다소 왜소해보였지만 오히려 화려하지 않고 , 인위적이지 않은 , 투박하지만 진심이 담겨있는 제주인의 모습과도 닮아보였다 .
제주도민에게 익숙한 오현중 · 고등학교의 ‘ 오현 ( 五賢 )’ 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 학교는 1972 년 까지 이곳 오현단에 자리 잡고 있다가 화북으로 이전했다 .
다섯 명현은 과연 누구길래 이렇게 제단까지 만들며 모시게됐을까 .
오현은 1520 년 유배온 충암 김정 선생 ( 조광조와 개혁정치로 기묘사회에 연루되어 유배됨 ), 규암 송인수 선생 (1534 년 김안로에 반대해 제주 목사로 좌천당해 옴 ), 청음 김상헌 선생 (1601 년 제주에서 역모를 꾀한 사건 조사를 위해 안무어사로 부임 ), 동계 정온 선생 (1614 년 영창대군의 죽음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려 유배됨 ), 우암 송시열 선생 (1689 년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자 이에 반대 상소를 올려 유배됨 ) 등 다섯 분이다 .
유적 내에는 오현의 유적으로 철종 7 년 (1856) 판관 홍경섭이 새긴 송시열 선생의 ‘ 증주벽립 마애명과 충암 김정 선생과 우암 송시열 선생의 ‘ 적려유허비 ’ ‘ 귤림서원묘정비 ’, 향현사유허비 등이 함께 세워져있다 .
그리고 오현의 시 한구절을 적은 시비도 세워져있는데 , 시 한구절 한구절에 담긴 오현의 심정이 가슴에 와 닿는다 .
바다 넘어 멀고도 먼 변방의 섬 제주 .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였을까 .
충암 김정은 유배당시 보고 느낀 제주의 상황과 지형과 문화 , 생활상 , 자기의 심정등의 기록을 남기게 되는데 이 책이 바로 ‘ 제주풍토록 ’ 이다 . 제주의 유배생활 1 년을 넘기고 충암 나이 36 세 유배지를 벗어났다는 죄목으로 그는 사약을 받게되는데 사약을 받아놓고 마지막 시 한수를 남긴다 . 이 마지막 시가 ‘ 임절시 ’ 이다 .
충암 김정 - 임절사 ( 臨蕝辭 )
외딴섬에 버려져 외로운 넋이 되려하니
어머님 두고감이 천륜을 어기었네
이 세상을 만나서 나의 목숨 마쳐도
구름을 타고가면 하늘문에 이르리
굴원을 따라 떠돌고도 싶으나
기나긴 어두운 밤 언제면 날이 새리
빛나던 일편단심 쑥밭에 묻게되면
당당하고 장하던 뜻 중도에서 꺽임이니
아 ~ 천추만세에 내 슬픔을 알리라
앞서 언급했듯이 오현단은 제주의 여느 제단들이 그러하듯 , 제주의 모습처럼 투박하지만 소박하고 검소함이 잘 나타나있다 .
하지만 너무 많은 비석들이 있어 , 어느 비석이 오현의 비석인지 도통 알 수 가없다 . 그리고 이 오현단에 수많은 제주의 이야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보는 턱없이 부족하다 .
알면 알수록 빠져드는 제주의 역사 . 향현사 앞 평상에 앉아 가을바람에 불려오는 오현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 .
하지만 너무 많은 비석들이 있어 , 어느 비석이 오현의 비석인지 도통 알 수 가없다 . 그리고 이 오현단에 수많은 제주의 이야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보는 턱없이 부족하다 .
알면 알수록 빠져드는 제주의 역사 . 향현사 앞 평상에 앉아 가을바람에 불려오는 오현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