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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박연준. 장석주 / 걷기예찬

[도서]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박연준. 장석주 / 걷기예찬

by 제주교차로 2020.02.12

이따금 아주 낯선 곳에 내 몸을 던져두고 싶어질 때가 찾아온다. 익숙하던 곳에서 멀리 벗어나 지구를 관찰하는 우주인처럼 그곳의 우주와 조우하고 싶을 때, 매일 바라보던 하늘도 다르게 느껴지고 주변에서 보는 나무도 달라 보이고, 새 소리는 처음 듣는 것처럼 나의 청각을 일깨운다. 도시를 떠나 자연이 살아 숨쉬는 호주의 작은 마을에 오래 지낸 적이 있었다. 광활하게 펼쳐진 자연을 마주하고 숨을 내쉴 때면 나도 마치 한 그루의 나무가 된 것처럼 동질감이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사람들 어깨 위에 내려앉는 친근한 앵무새는 잠시 앉아 있다 다시 나무로 날아가곤 했다. 그 시절은 참 많이도 걸었다. 그래서인지 내 발바닥은 딱딱해지고 굳은살이 자리 잡았다.
세상이 궁금했던 호기심 많은 여행자는 새로운 세상과 조우하며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기도 했고 지나간 과거의 행동을 반성하기도 하면서 참 많이도 걸었다. 걷고 있을 때는 오롯이 내 자신의 호흡에 집중하며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머릿속으로는 한 가지 상념이 자리 잡았다가 다시 떠나고, 또 다른 문으로 다른 상념이 또 밀고 들어왔지만 걷고 있을 때만큼은 자아 성찰의 시간이 된다.
- “발바닥은 항상 옳다. 발바닥이 옳은 것이라면 발바닥을 써서 걷는 일도 옳은 일일 테다. 네발로 걷는 소나 당나귀나 낙타가 비도덕적으로 엇나간 경우를 보지 못했다. 게으름을 피운 적은 있어도 수뢰나 비리 따위에 연루된 적이 없다. 그들은 풀을 먹는다. 초식에 길들여진 이 정직한 식성은 항상 순결하고 옳다. 두 발로 걷는 사람들도 그렇다. 시드니를 한 달 동안 걸어보기로 했다. 느리게, 해찰하며 천천히 걸어보기. 두 팔을 흔들고 두 발을 움직이며 전진하는 이 단순한 행위, 바람과 햇빛을 맞으며 육감적 복잡성 속으로 자신을 밀고 들어가기.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뛴다. P와 나는 그 옳은 일을 해보기로,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는 고결한 선택을 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中 P.120 -
이 책의 부부(장석주 시인과 박연준)는 신혼여행 겸 시드니에서 한 달간 보냈다. 시간을 빨리 쓰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그럴수록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낯선 곳을 탐험하듯 천천히 걷고 천천히 해나갈 때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가지게 된다. 걷고 나면 무거웠던 몸은 가벼워지고 묵직했던 기분도 함께 가벼워지며, 비로소 마음은 한결 단단해지기도 한다. 다비드 르 브로통이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라고 ‘걷기예찬’에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천천히 오래 걷자고 말하는 아내, 2인분의 고독을 늠름하게 받아 생의 순간들을 함께하자는 남편은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걷는다. 둘은 시드니의 낯선 곳에 잠시 머물며 결혼식 대신 쓴 책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를 냈다. 혼자 걸어도 좋지만 2인분이 된 고독을 받아들이며 걷는 것은 더 든든할 것이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걷는 세상은 사랑도 존재하지만 불협화음과 다름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잡고 이끌며 걸음 보폭을 맞춘다. 마음은 한없이 너그러워지고 몸은 느슨하게 이완되는 순간 소중한 것들이 찾아온다.
삶의 속도를 늦추며 비로소 찾아오는 여유, 걷는다.
그리하여 걷는다.

-여행작가, 라라
애월에서 소규모숙소<달빛창가302호>를 운영, 여행서<연애하듯 여행>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