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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

오름 : 동부권

오름에 넘실대는 바다, 억새 '따라비오름'

오름에 넘실대는 바다, 억새 '따라비오름'

by 이현진 객원기자 2017.11.16

창피하게도 내가 억새와 갈대의 차이를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제주도에 살면서도 억새를 보며 "와, 역시 갈대밭은 제주야"라고 했으니까. 이 섬에 이사와 두 번째 가을을 지나고 나서야 억새를 억새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갈대는 주로 습지, 물가에서 자란다. 그러니까 제주의 오름에서 넘실거리는 친구들은 갈대가 아닌 억새다. 갈대가 갈색을 띤다면, 억새는 은빛이라고 할 만큼 보다 흰 편이다.

육지에 살 때 제주여행은 늘 가을에 왔다. 가을풍경이 가장 예쁘다는 생각이 은연 중에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이유의 중심에는 물론 억새가 있었다. 서울 하늘공원의 억새축제도 매년 보러 갔지만, 오름의 능선을 따라 흐드러진 제주의 억새가 보고 싶었다.

해는 유난히 억새가 풍성해 보인다. 태풍이 제주도를 비껴가면서 단풍과 억새도 온전하게 살아남은 모양이다. 새별오름, 아끈다랑쉬오름, 용눈이오름, 산굼부리 등 억새 명소가 많이 알려져 있는데, 최근에 갔던 표선면 가시리의 따라비오름은 “천국 같아”라는 진부한 표현의 감탄사라도 빨리 선사하고 싶을 정도로 멋있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몇 번 따라비오름을 올랐지만, ‘오름의 여왕’이라는 수식이 크게 와 닿은 적은 없었다. 능선의 우아한 굴곡이 빼어나다고 해도, 내 눈에는 용눈이오름의 완만한 능선이 가장 아름답게 여겨졌다. 게다가 다랑쉬오름 못지않은 높은 경사의 언덕이 몇 군데 있어 늘 ‘힘들었다’는 인상을 남겼다.

억새를 보고 싶지만 등산은 달갑지 않은 분들이라면, 따라비오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것을 추천한다. 늘 왼쪽으로 진입해 나무계단으로 올라가는 것을 정방향으로 여기고 있었던 내게 남편은 오른쪽이 둘레길이라 덜 힘들다고 안내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날 한 여성분도 나무계단이 이어지는 숲길 앞에서 “별로 올라가고 싶지 않다”고 망설이고 있는 걸 봤는데 나 역시 따라비오름을 버겁게 느꼈던 이유가 그 계단 때문이었던 것 같다.

둘레길로 가면 완만해서 가볍게 산책을 시작할 수 있을뿐더러, 양쪽으로 펼쳐진 억새밭을 계속 감상하면서 오를 수 있다. 오래지 않아 갑마장길과 큰사슴이오름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따라비오름의 정상이 올려다 보이는 이곳에서 억새가 능선을 따라 물결을 치며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계단길로 갔으면 이 풍광을 등지고 내려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흙길을 택한 것이 더 마음에 든다. 몰라 뵀던 ‘여왕’ 따라비에게도, 갈대라 불렀던 억새에게도 왠지 미안해진다.

정상에 닿기 전, 막바지 오르막에서 고비의 순간만 넘기면 무려 3개의 분화구를 가진 독특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정상에서는 큰사슴이오름부터 성불오름, 백약이오름, 멀리는 거문오름까지 한눈에 보인다. 동쪽의 억새 바다를 만족스럽게 보고 나니, 올해도 가을이 지나가는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