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 향기 맡으며 솔숲 길을 걷자 '세미오름'
봄꽃 향기 맡으며 솔숲 길을 걷자 '세미오름'
by 양영태 객원기자 2019.04.26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의 참혹한 모습과 절망을 담은 T.S 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시의 서두에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 했다. 우리들의 4월 역시 잔인한 달로 기억된다. 역사의 참혹함이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달이다. 하지만, 더 이상의 아픔이 반복되지 않고 아름답고 따스한 봄을 노래할 수 있는 4월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안고 봄꽃 향기 물씬한 솔숲 오름을 오른다.
이름에 ‘물’이나 ‘샘’이 붙은 오름이 여럿 된다. 물장오리, 안세미, 절물오름, 물메, 물찻오름 등등. 지도에는 ‘세미양오름’ 또는 ‘세미오름’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아라동의 ‘세미오름’도 ‘샘과 관련된 오름이다. 오름에 샘이 있어서 예전부터 세미오름이라고 불렀다. 세미오름은 아라동의 516로를 따라가다 제주지방경찰학교 앞으로 진입할 수도 있지만, 오름 서쪽 방향인 관음사로 향하는 산록북로 쪽 신비의 도로 못미처 조천 계곡을 건너서 진입하면 운치 있는 오름 산행을 할 수 있다.
세미오름은 조천과 방천의 두 하천을 좌우로 거느린 오름이다. 조천과 방천은 세미오름을 지나 아라동에서 합류하여 방천으로 흐르다, 거로마을에서 화북천과 다시 합류되어 화북천으로 흐른다. 한라산의 흙붉은오름에서 발원한 화북천은 여러 지류가 만나 하나의 본류가 되는 하천이다. 오름을 오르기 전에 계곡을 잠깐 둘러봐도 좋다. 관음사 동쪽에서 본격적으로 형성된 하천은 세미오름 근처에 이르면 제법 그 모양을 갖추어 깊은 계곡과 비가 올 때면 볼 수 있는 폭포도 가지게 된다. 요즘은 하천을 따라 여러 둘레길이 만들어져 있어 사람들이 항상 찾는 곳이기도 하다.
하천으로 접어들면 낙엽활엽수 숲과 각종 봄꽃이 가득한 계곡의 풍광과 함께 향기 좋은 목련도 만날 수 있다. 고귀함, 숭고함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나무에 피는 연꽃인 목련은 우리나라에서는 제주에서만, 그것도 조금 높은 숲속에서만 간혹 볼 수 있는 꽃나무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목련이라고 하는 꽃나무는 백목련과 자목련이다. 백목련은 꽃잎이 넓고 풍성하지만 토종 목련은 꽃잎이 얇고 길쭉하며 꽃송이가 빈약하다. 아름다운 순백의 모습을 보며 봄이 왔음을 느낄 때 쯤 짧은 생애를 살다 하얗게 부서져버리는 꽃이다.
조천 계곡을 건너 오름의 서쪽 등성이의 자그마한 계곡을 지나 오르다보면 초록의 새잎을 내는 낙엽수의 숲을 지나 본격적으로 오름에 접어들게 된다. 오름에 오르면 조림된 편백나무와 삼나무와 함께 소나무의 무성한 숲을 만날 수 있다. 오름의 정상에는 야트막한 풀밭의 굼부리를 이루고 있으며, 화구 안쪽의 일부사면에는 묘들이 많이 조성되어 있다. 굼부리 주위를 밋밋한 등성마루가 에워싸 둥그런 원을 그리고 있다. 예전에는 방목하는 우마가 많아 초록의 풀밭이 정겨웠었는데 지금은 잡목과 함께 조금은 지저분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원형의 굼부리는 남쪽사면으로 용암유출 흔적의 작은 골짜기를 이루며 내려가고, 골짜기가 시작되는 상단부 나무수풀 속에는 샘의 흔적과 함께 물이 조금씩 흐르고 있다, 예전에는 우마의 목을 적실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물이 나왔지만 지금은 모두 무너져 그 형태도 감 잡을 수 없을 모양으로 변해버렸다. 굼부리에 샘이 있는 오름은 특별하다. 그 특별함을 오름 탐방객들도 느낄 수 있도록 조금은 손을 보면 어떨까. 샘터에서 나온 물은 조금씩 흘러 골짜기를 향하고, 남쪽의 골짜기는 갑자기 낭떠러지로 떨어져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진다. 골짜기에는 여러 나무들이 서로 어우러져 숲을 이루고 있고, 동쪽 사면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
샘을 지나 서쪽 능선으로 접어들면 소나무 숲이 펼쳐지고, 숲 사이 양탄자를 깐 듯 푹신푹신 밟히는 솔잎 길을 지나다 보면 달콤 짭쪼름한 솔향기가 뺨을 스치는 바람을 타고 코를 간지럽힌다. 사뿐사뿐 솔숲을 지나면 시야가 트이고 멀리 한라산과 제주시내 풍광을 좌우로 볼 수 있는 정상에 다다른다. 오름의 능선을 한 바퀴 돌면 다시 샘터와 만나고, 그렇게 짧지만 풍성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오름 주변의 비문에는 오름 이름을 ‘泉味岳(천미악), 三義岳(삼의악), 思味岳(사미악)’ 등으로 표기하였다. 천미악과 사미악은 ‘세미오름’에 대응하는 말이다. 마을의 고로(古老)들은 오름 정상 굼부리에 원래 ‘세미(샘, 泉)’가 있었다는 데서 '세미오름'이라 하였다고 한다.
솔향기를 털어내고 내려오는 계곡에서 목련꽃의 알싸한 향기가 나를 따라 온다.
오름 주변의 비문에는 오름 이름을 ‘泉味岳(천미악), 三義岳(삼의악), 思味岳(사미악)’ 등으로 표기하였다. 천미악과 사미악은 ‘세미오름’에 대응하는 말이다. 마을의 고로(古老)들은 오름 정상 굼부리에 원래 ‘세미(샘, 泉)’가 있었다는 데서 '세미오름'이라 하였다고 한다.
솔향기를 털어내고 내려오는 계곡에서 목련꽃의 알싸한 향기가 나를 따라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