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이미지

오름

오름 : 서부권

동거문 오름

동거문 오름

by 작은거인 2008.07.31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억새는 절반으로 몸을 꺾은 채 누워 우우우 신음을 토하고, 새들은 몰아치는 바람 앞에 속수무책 날아오르지 못했다. 오른쪽으로 긴 곡선을 그리며 누운 오솔길을 따라 들어갔다. 다행히 왼쪽으로 언덕이 솟아올라 바람을 막아준다. 이 섬의 여느 언덕이 그렇듯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억새를 꽂아 놓았다.
경망스럽게도 억새풀만 보면 피를 떠올리게 된다. 억새는 유리의 원료가 되는 규사성분을 좋아해 잎을 잘못 다루다가는 손을 베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곳의 억새는 사람의 손만 벤 것이 아니라 가슴까지 뭉텅뭉텅 잘라 버렸다. 아는지 모르는지 대형버스에서 내린 한 떼의 관광객은 바람에 누운 억새에 환호작약이다.
대체로 오름을 둘러싸고 있는 삼나무는 밀감밭을 두른 삼나무와는 또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밀감밭의 그것이 애당초 감당할 수 없는 바람을 막아보자는 우장춘 박사의 아이디어였다면 오름의 그것들은 방목지를 벗어나려는 마소를 막아보자는 것이다. 눈앞에 늘어진 삼나무 열매를 잡아 따자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한 향기가 콧속을 자극한다. 말로만 듣고 글로나 보던 삼나무 향기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빽빽하게 어깨 걷고 선 삼나무 울타리 사이로 친절하게 사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는 불편을 끼쳐서 죄송하다며 푯말까지 박아 놨다. 사유인지 공유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소를 치고 있다면 얼마간의 기간을 두고 자신에게 모든 권리가 귀속되었을 것인데 울타리로 인해 죄송하다는 이 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잠시 헛갈린다.
조심스레 사다리를 넘어 오름으로 들어서자 너 잘 만났다는 듯 한꺼번에 바람이 몰려온다. 관목 뒤로 몸을 숨겨 보지만 당치않은 짓이다. 소를 치면서 일궈놓은 초지에 바람막이로 제 기능을 수행할 만한 나무가 있을 리 만무다. 고개를 들어 능선을 올려다보니 눈대중만으로도 기가 질리는 경사가 버티고 서 있다. 차라리 육지의 산이라면 가파르더라도 바람 맞지 않고 오를 수 있겠으나 납작 엎드려 포복하지 않는 이상 바람을 피하기는 글렀다. 또 포복을 하더라도 도처에 지뢰처럼 뿌려놓은 소똥을 비켜가기란 불가항력일 것 같다.
자주씀풀이 융단처럼 깔려 있고 드문드문 섬민들레며 물매화도 곁들여 있다. 귓바퀴는 금새 아려오지만 반대로 등짝에서는 후끈거리며 땀이 밴다. 멀리서 보면 마치 경상북도 경주에 여기저기 솟아오른 옛 임금의 무덤 같아서 산 꽤나 탔다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오른다’는 말조차도 과분한 것으로 생각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복이 아니라 ‘디뎠다’는 것으로 의미를 돌려놓으면 제주 사람에게는 물론 관광객에게도 이 섬의 속살을 한 번 만져보는 것으로 만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동거문 오름은 산재한 360여 오름 중에서도 가장 ‘이쁜’ 오름으로 꼽힌다. 오름 하나에 분화구 하나가 정석이지만, 이 곳은 무려 다섯 번에 걸쳐서 화산폭발이 일어나 분화구의 원형은 온전하지 못해도 ‘밟기’에도 ‘보기’에도 단조롭지 않다는 것이다.
생뚱맞은 이야기이지만 여기저기에 싸질러놓은 소똥무더기 중의 한 덩어리를 골라 작대기로 헤쳐 보는 걸로 당신의 운을 시험해 볼 수도 있다. 무슨 이야기 인고 하니 운이 출중한 사람이라면 똥 무더기 속에 터를 잡은 쇠똥구리를 발견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까짓 벌레 한 마리가 무슨 대수랴마는 복합사료를 이용해 소를 키우게 되면서 우리 주위에서 사라져 버린 쇠똥구리와의 재회를 통해 잠시나마 미래를 가늠해 보라는 권유이기도 하다.
하산길은 수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만만하기까지 한 것은 아니다. 자칫 길을 잘 못 들어서면 힘들지는 않더라도 조금 성가시게 된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다행이지만, 새로운 길을 통할 거라면 초지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에서 낮게 등성을 에두르면 된다.
경사를 오르내리는 동안 충분히 데워진 몸은 여전히 몰아붙이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한결 상쾌한 공기를 만끽할 수가 있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억새는 여전히 등이 휘지만 동거문 오름은 또 한 차 실어내고 바지춤을 털며 다음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글, 사진 권영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