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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

오름 : 서부권

눈물이 서릴 만큼 하얀 얼굴, 겨울 한라산의 그 고아함..

눈물이 서릴 만큼 하얀 얼굴, 겨울 한라산의 그 고아함..

by 제주교차로 2011.01.17

자고로 등산의 묘미는 겨울 산행에 있다. 물론 청바지 하나 달랑 입고 블리자드급 눈보라 속을 헤치면 “아~ 이래서 노스 페이스 노스 페이스 하는구나!”란 말이 절로 나오겠지만 고작(?)추위 때문에 등산을 포기하기엔 겨울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이 너무나 다양하고 너무나 강렬하다. 강렬하다? 뭔가 겨울 산과는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라 생각되겠지만 눈이 시릴 만큼 파란 하늘과 온통 하얗게 물든 산의 대비는 그 어떤 풍경이나 사진보다 강렬하게 다가온다. 지난 주말 찾은 한라산 역시 그러했다.
오랜만의 겨울 산행을 위해 지난 주말 찾은 성판악은 입구 초입부터 제법 많은 눈으로 덮여있었다. 하늘높이 솟은 나무며 바위며 땅이며 전날 내린 눈의 흔적이 수북이 쌓여있다 보니 단순히 쌓여있다 란 표현보다는 덮여있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였다.
매번 영실코스로 한라산을 오르다 이번에는 특별히 성판악을 택했다. 비교적 자주 찾은 영실이 지겹기도 했거니와 내키면 정상까지 도전해볼 요량으로 성판악 코스로 결정했다.
공식적인 한라산 등산 코스는 영실과 성판악을 비롯해 몇 개가 있지만 정상에 올라 백록담을 볼 수 있는 구간은 성판악과 관음사 코스밖에 없다. 하지만 일요일 아침의 꿀맛 같은 단잠 탓에 한라산 정상은 산행 시작부터 물 건너가고 말았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선 진달래 대피소까지 12시안에 올라야 하는데 여유부린 출발 탓에 이번에도 역시 정상에서 바라보는 제주 절경은 다음으로 미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정상에 올라야만 산행의 맛을 느끼는 것일까? 제 발 밑에 정상을 두지 않더라도 산에 오르는 그 시간만으로도 등산은 충분히 매력적인 일이다. 늦잠과 게으름에 대한 나름의 변명을 등산 본연의 재미를 위한 일이라 합리화하며 그렇게 산행을 시작했다.
눈이 제법 많이 쌓여있는 까닭에 미리 준비한 아이젠을 등산화에 착용했다. 뽀드득 뽀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젠이 눈 속에 박혀 들어간다. 다행히 아이젠을 착용해서 그런지 미끄럽지는 않다. 온갖 티셔츠와 바지를 껴입은 탓에 추위 역시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 등산인생에 손꼽을 만큼 바람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씨였기에 추위를 더욱 느끼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등산길 옆으로 자리한 나무들은 모두 하얀 눈으로 덮여있다. 사진촬영 할 요량으로 등산코스를 벗어나 옆길로 들어서자 첫 발부터 푹푹 빠진다. 눈이 얼마나 많이 쌓였는지 순식간에 허벅지 까지 들어간다. 다행히 아이젠과 함께 스패츠를 착용했기에 신발과 옷 속으로 눈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지난겨울에 아무런 준비 없이 한라산에 올라 갖은 고생을 했기에 이번에는 나름 조촐한 산행 준비를 했다. 스패츠 역시 그러한 사전 준비물 중 하나다.
등산로는 끝없이 이어졌다. 보이는 거라곤 온통 눈. 나무에 걸린 눈들이 마치 하얀 포도송이처럼 가지에 매달려 있고 이미 고목으로 변한 구상나무들 역시 마찬가지다. 잠시 쉬며 고개를 들어본다. 하얀색 가지의 빈틈 사이로 파란색 하늘이 선명하게 펼쳐진다. 마치 파란색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다. 아무렇게나 셔터를 눌러도 찍히는 족족 작품이다. 티 없이 맑은 하늘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오늘에서야 새삼 느낀다.
배낭 속에 넣어둔 초코과자를 꺼내 입에 넣었다. 마치 냉장고에 넣어뒀던 것처럼 알맞게 얼어있어 색다른 맛이다. 겨울산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있는 재미다.
뽀드득 거리는 눈을 밟으며 한 참을 올라갔다. 야트막한 경사와 능선이 계속 이어진다. 중간 휴게소를 지나 제법 많은 걸음을 옮겼음에도 이렇다 할 힘든 경사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무난하고 부담 없는 경사가 계속 이어질 뿐이다. 경치 역시 온통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너른 장관을 볼 수 없다. 동행한 이에게 물어보니 원래 성판악 코스는 경치에 대한 만족도가 조금은 떨어지는 편이라고. 단 정상에 오르면 그동안 꼭꼭 숨겨뒀던 비경을 여실이 보여준다고 한다. 결국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나는 나무나 실컷 보라는 얘긴가. 이 나무가 이 나무 같고 저 나무가 저 나무 같은 풍경이 계속 이어진다. 그래도 성판악을 처음 오른 내게는 마냥 신기할 따름이다.
얼마쯤 지났을까 오늘의 목표인 진달래 밭 휴게소에 당도했다. 비록 정상에 올라야 한라산의 제대로 된 비경을 감상할 수 있다고 했지만 이곳 역시 힘들게 올라온 등산객들을 위해 멋들어진 장관을 선사했다.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온통 하얀 눈과 파란 하늘 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國)’이 연상된다.
겨울의 한라산은 봄의 싱그러움, 여름의 푸름, 가을의 화려함과는 다른 눈물 나게 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눈물이 서릴 만큼 하얀 얼굴, 겨울의 한라산은 그 고아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반겼다. 이곳이 이럴 진데 하물며 정상은 어떠할까. 한달음에 백록담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미 시계는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상의 비경을 눈에 담지 못하는 아쉬움을 따뜻한 컵라면 한 그릇으로 달래며 산 아래로 발길을 돌렸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 가면 가을과 겨울이 오듯, 앞으로 겨울은 계속 올 테고 한라산은 늘 있던 곳에서 묵묵히 자리하고 있을 테니 다음을 기약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많은 않을 것이다. 한라산의 겨울을 알아 버린 나 역시 아마 내년 이맘때도 다시 이곳을 찾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