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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

오름 : 동부권

백약이오름

백약이오름

by 한결같이 2008.07.31

바람의 봉분, 백약이오름
바람의 길과 사람의 길은 다르지 않다. 탐라의 길이 곧 바람의 길이었다면, 바람의 길일 것이라면 그 길을 따라 탐라인의 삶도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사람의 길이 끊어진 곳에서 다시 바람의 길은 시작되고, 바람의 길을 따라 사람은 또 길을 만들며 오른다. 백가지 약초가 자란다고해서 ‘백약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 곳에서도 바람은 어느새 수 백 갈래의 길을 만들며 흩어진다. 오름의 도처에 자생하고 있는 관목들도 키를 낮춰 바람으로 하여금 좀 더 자유로운 길을 가게 한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며 백약이오름의 정상에 서면 수십만 년 전 온 천지를 뒤흔들며 불을 뿜었다는 분화구가 드러난다. 그 장엄했을 불의 길은 이제 입구를 초지(草地)로 틀어막고 긴 휴식중이지만 여전히 온기를 간직하고 있는지, 방목중인 말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어 정상부근의 매운바람을 피하고 있다.
한라산을 중심에 두고 뻗어 내린 탐라에서는 몇 십 미터의 높이에서도 땅위의 일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억새 풀 속에 교묘하게 숨겨 놓은 오솔길도, 더 낮은 언덕과 오름이 뒤섞인 삼나무 군락지의 속사정도, 나름대로 은밀하게 치러보려던 조랑말의 짝짓기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다.
금방이라도 흐린 하늘이 갈라지면서 이글이글 타는 해가 솟아나올 것 같은 일출봉이 보이고, 성산포항으로 짐작되는 곳을 건너면 소처럼 편안히 누웠다는 우도다.
일출봉도, 우도도 전설의 섬 이어도처럼 한때의 환상인 듯 눈앞에 있다. 우리가 시각을 통해 각각의 명칭을 일일이 대조하는 순간에도 바람은 또 다른 길을 만들며 불어온다. 바다에서 갓 올라온 바람은 잠시 몸 말릴 틈도 없이 백약이오름을 넘어 한라산을 향해 치달아 간다. 신산했던 탐라인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숱하게 건너온 질곡처럼 울퉁불퉁 깔린 오름을 넘어서, 한라산을 돌아 저 광활한 대륙을 향해 바람은 몰려갈 것이다.
<글, 사진 권영오/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