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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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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의 여왕, 다랑쉬 오름

오름의 여왕, 다랑쉬 오름

by 하루이야기 2008.07.31

다랑쉬 오름 을 앞에다 두고 오래 된 팽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 육지에서 마을 어귀에 느티나무를 심어 정자나무로 삼듯이, 이 곳에서는 팽나무가 그 자리를 지켜왔다. 올레를 빠져나와 팽나무가 서 있고, 그 팽나무 아래서는 자주 오메기술판이 벌어지곤 했다는데 사방을 샅샅이 둘러보아도 인기척이라고는 없다. 바람에 휘어지는 조릿대 군락만이 이 곳에 민가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다랑쉬 마을은 1948년 11월 현대사의 질곡 속으로 사라져 갔다. 4․3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악다구니가 횡행하는 동안 이념의 공방전에 밀려 불에 타 사라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무수한 가지를 뻗어 다랑쉬 마을을 지키고 선 이 팽나무는 아수라 같았을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다랑쉬 오름은 정부군에 등 떠밀려 떠나야 했던 이 마을 사람들의 의식처럼 가파르게 도사리고 있다. 여느 오름과는 달리 커다란 안내판이 설치돼 있고, 목재 계단과 폐타이어로 된 등산로가 과연 ‘오름의 여왕’이라는 말이 헛말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삼나무가 잘 조림된 초입을 지나자마자 바람이 몰아쳐 온다. 온 산을 장악한 억새가 엎어지면서 내는 소리는 마치 정부군 쪽으로 몰렸다가, 반군 쪽으로 몰렸다가 갈피를 잡지 못 하고 우왕좌왕하던 민중의 아우성 같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길도 가파르고 바람도 가파르다. 이 와중에도 쑥부쟁이는 보랏빛 꽃잎을 밝혀 들고 띄엄띄엄, 그러나 선명하게 피어 있다. 저 들꽃은 대체 무슨 힘으로 바람을 견디며 맵찬 겨울 날씨를 이길 것인가. 쑥부쟁이뿐만이 아니라 도무지 이름을 알 수 없는 갖가지 덩굴식물도 초록빛 팔을 뻗어 다랑쉬를 감싸고 있다.
벅찬 숨을 몰아쉬며 잠시 걸음을 멈추자 박무를 뚫고 나온 우도가 희미하게 얼굴을 내민다. 그 앞으로 일출봉이 있고, 문필봉이 보이고, 코앞에는 아끈 다랑쉬가 엎어놓은 사발 모양으로 자리 잡았다.
언젠가 어느 시인의 시집을 뒤적이다가 아끈 다랑쉬라는 말을 발견하고 신기해 했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다랑쉬라는 말도 마음에 긴 여운을 남겨주지만 아끈 다랑쉬는 마치 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는 어느 아름다운 마을의 뒷모습을 그리는 말처럼 들린다. 아끈 다랑쉬에는 말들이 옹기종기 모여 풀을 뜯고, 그 모습이 그림엽서의 그것처럼 예쁘다.
분화구 안은 딴 세상처럼 조용하다. 너무나 아늑하여 군데군데 쌓아놓은 돌탑(돌무더기)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재빠르게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싶다. 생각난 김에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이 정말로 분화구 모양과 똑 같이 둥글다. 우물 안 개구리가 이런 상황일까? 지나온 일도, 닥쳐올 일도 모른 채 안온함에 만족하는 것. 동그란 하늘에 떠오르는 별만으로 별점을 치고, 동그란 하늘만 가린 먹장구름으로 호우를 예상하고……. 혹시 그렇게 살아 온 것은 아닌지.
분화구에서 빠져 나가는 일도 세상사와 마찬가지로 쉽지가 않다. 자주 미끄러지고 자주 흔들린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움켜잡았던 억새는 칼날을 숨기고 있고, 쥐똥나무는 가시를 숨기고 있다. 메마른 화산토를 밟아도 미끄러지고, 꺾어진 억새 잎을 밟아도 미끄러지기는 마찬가지다.
누군가 길을 만들려다 만 것인지 동검이 오름을 향해 길다란 밑그림을 그려놓았는데, 규모는 좀 작지만 마치 페루의 나스카에 그려진 ‘지상 그림’과 흡사하다. 직선의 중간쯤에 동그라미 표시도 돼 있는 것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외계의 누군가가 이 땅의 누군가를 향해 띄운 메시지 같기도 하다.
터무니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하늘이 급격하게 어두워진다. 일출봉 일대에 머물던 구름이 몰려오는 모양이다. 여전히 바람은 불고, 또 여전히 사람들은 가파른 길을 따라 불구멍을 향해 올라온다. 산은 ‘그 곳에 산이 있어 오른다’지만, 오름을 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곳에 오름이 있어서?
내려가는 길은 그나마 수월할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폐타이어로 길을 만들지 않고, 양 옆으로 동아줄이 없었다면 오르기에도 내려가기에도 막막했을 것 같다. 사람이 사는 것도 이와 같을까? 오르막은 오르막대로 힘이 들고, 내리막은 또 내리막대로 다리가 접히는 것일까?
돌무더기에 아무렇게 세워놓은 ‘다랑쉬마을’이라는 나무 팻말이 어두워지고 있다. 아마도 그 당시 지금쯤은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오르고 올레마다, 고샅마다 재잘거리는 아이들 소리로 분주했을 것이다. 하나 둘 호롱불이 켜지고 별이 켜지고, 아랫목의 장판이 눌어붙으며 밤이 깊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