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이미지

오름

오름

사라져버린 피뿌리풀의 슬픈 전설 ‘아부오름(앞오름)’

사라져버린 피뿌리풀의 슬픈 전설 ‘아부오름(앞오름)’

by 양영태 객원기자 2019.08.26

“게걸스럽다”를 네이버 인터넷 사전에서 검색하면 “몹시 먹고 싶거나 하고 싶은 욕심에 사로잡힌 듯하다.”라고 나온다. 또 “게걸”은 “염치없이 마구 먹거나 가지려고 탐내는 모양. 또는 그런 마음”이라고 한다. 어느 방송 드라마에서는 “게걸=욕망”이라는 자막이 나온다. “게걸”이라고 말을 해보면 어쩐지 인간의 욕망을 잘 표현한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뜬금없이 떠오른 단어 “게걸”
아주 오랜만에 아부오름을 올랐다. 근 10년 만에 오른 것 같다.
아부오름은 송당리 마을 남쪽에 있는, 표고 301미터 비고 51미터의 오름이다. 일찍부터 ‘아보름’이라 불렸고 송당마을과 당오름 남쪽(앞쪽)에 있어서 ‘앞오름’이라 하며 이것을 한자로 빌어 표기한 것이 ‘前岳’이다.
또한 산모양이 움푹 파여 있어 마치 가정에서 어른이 믿음직하게 앉아 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아부오름’이라고도 한다. 오름 정상에 함지박과 같은 둥그런 굼부리가 파여 있다. 굼부리 비탈에는 스코리아층이 있다.
오름 대부분은 풀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인공으로 심은 삼나무가 있고 그 사이로 상수리나무, 보리수나무 등이 있다. 풀밭에는 솜양지꽃, 풀솜나물, 향유, 쥐손이풀, 청미래덩굴, 찔레 등이 여기저기서 자란다.
이것은 오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오름 안내판의 내용이다.
탐방로에 깔려 있는 야자매트를 따라 완만한 경사로를 350여 미터만 오르면 정상에 다다르는 낮은 오름이지만 정상에 오르는 순간 새로운 세계에 온 듯 착각할 정도의 전망을 자랑하는 오름이다. 대형의 원형분화구와 그 안에 다시 원형의 삼나무 조림지가 눈에 들어오는가 하면, 사방에 널려 있는 오름군과 한라산을 조망할 수 있는 풍광이 아름다운 오름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하는 오름이다.
요즘 제주에는 시쳇말로 핫한 오름이 여럿 있다. SNS라는 새로운 문명의 도움을 받아 널리, 그리고 빠르게 전달되는 정보를 바탕으로 오름 위에서의 재미있고 독특한 사진들이 퍼지면서 관광객의 발길을 끌고 있는 오름 들이다. 아부오름도 그런 오름 중의 하나이다. 오름 입구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차들은 대부분 허 하 호 등의 번호판을 단 렌터카들이다. 친구들과 아니면 연인끼리 또는 가족들과 함께 오름을 오르고, 오름 정상 남쪽에 남아 있는 풀밭위에서 온갖 포즈로 사진을 찍거나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오름 안내표지판 내용 중에는 ‘오름 대부분은 풀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10수년 전의 모습이다. 오름 정상 능선을 따라 빙 둘러 놓여 있는 탐방로를 따라 한 바퀴를 돌면 어느 곳에서나 사방을 조망할 수 있고, 굼부리 안의 원형 삼나무 조림지도 뚜렷이 볼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또한 봄에 오름을 오르면 사방에 피는 피뿌리풀을 만날 수 있었다.
5-6월에 줄기 끝에 10개에서 20여개의 짙은 홍자색 꽃이 머리모양꽃차례를 이루어 피는 피뿌리풀은 뿌리의 색이 피와 같이 붉은색이어서 이름 붙여진 식물로 우리나라에는 제주도의 동쪽, 그것도 아부오름과 그 주변에만 있었던 식물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식물이 옛날 몽골에서 망아지를 들여온 뒤에 퍼졌다고 하는 것이다. 아마도 말의 분뇨에서 나온 씨앗이 자랐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현재 몽골과 중국에 피뿌리풀이 많이 분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이다.
우리 땅에는 점차 사라지고 있는 식물이 꽤 많다. 해마다 개체수가 감소하여 멸종위기식물로 분류되어 관리되고 있는 식물 중 하나가 피뿌리풀이다. 10수년 전, 매년 봄이 되면 넓은 풀밭에 옹기종기 모여 예쁜 홍자색의 꽃을 피우는 피뿌리풀을 카메라에 담으려 설레는 마음으로 올랐던 아부오름. 어느 봄날에 올랐던 그 곳의 처참한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많던 꽃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있을 만한 곳을 허겁지겁 헤매며 찾아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꽃은 없었다. 누군가 캐간 흔적들만 남기고. 그 뒤로 몇 년을 매번 찾았지만 아부오름에서는 더 이상 피뿌리풀을 만날 수 없었다.
오름에 올라, 오름 위를 돌면서, 오름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는 제주도 사람들도 별로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저 관광지의 하나 이상은 아니기에 희희낙락하며 인증 샷 찍고 놀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불현 듯, 목숨을 뺏기고 사라져버린 피뿌리풀의 슬픈 전설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그 이후부터 찾지 않았던 아부오름을 오르며, 훌쩍 커버린 소나무들과 작아져버린 주위의 풍광, 없어진 풀밭들과 함께 떠오른 단어가 “게걸”이었다. 지금도 포털사이트의 검색창에 “피뿌리풀”을 치면 나오는 단어가 “피뿌리풀 판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