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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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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엔 조각구름, 오름에 은빛 물결 ‘따라비오름’

하늘엔 조각구름, 오름에 은빛 물결 ‘따라비오름’

by 양영태 객원기자 2019.10.29

가을이 그 향기를 가득 품을 때쯤이면 꼭 가보는 오름이 있다. 가을이 되면 햇빛을 받은 억새의 은빛 물결이 오름 가득 출렁이는 오름 “따라비오름”. 몇 년 전 찾았을 때 억새가 사라져 실망했던 따라비오름을 향해 길을 떠난다. 요즘 따라비오름을 가는 사람들은 가시리마을 쪽으로 오른다. 포장된 농로가 오름 아래까지 나있어 접근성은 좋지만 가을 오름 따라비와 억새의 풍광을 제대로 느끼기에는 무언가 부족함을 느낀다. 나만의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따라비오름은 성읍2리 남쪽 남영목장 쪽으로 오르는 것이 제멋이다.
바람을 막기 위해 심어놓은 삼나무 울타리 사이로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메밀꽃들이 파란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는 밭을 지나고, 재잘대는 동네 아줌마 물봉선 꽃의 붉은 입술에 입맞춤해주며 길을 가다 보면, 어느덧 길은 가을빛을 가득 담은 초원의 입구를 지나고 있다. 쑥부쟁이, 미역취, 참취, 등골나물, 층층잔대 등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오름과 들판을 수놓는 많은 야생화들과 억새가 어우러진 들판 멀리, 한라산의 고운 모습이 눈에 받친다.
길을 나선지 20여분. 소나무 숲 언저리를 돌아서는 순간 오름의 자태가 눈에 들어선다. 아직은 다 베어버리지 않은 목장 안 남아있는 억새밭 사이로, 아침 햇살을 가득 받으며,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억새를 미끼로 나그네를 꼬이는 오름. 따라비오름이 그 곳에 있다. 지금은 소나무가 많이 자라버려 예전의 그 미끈하게 반짝이는 자태는 퇴색되었지만 그래도 봉우리와 능선으로 이어지는 오름의 모습은 단연 오름 중의 오름이라는 자존감을 보여준다.
억새의 물결은 아침이나 저녁, 햇살이 역광으로 비출 때가 제멋이다.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흔들며, 햇빛을 받아 일렁이는 억새의 물결은, 조물주가 인간을 달래기 위해 던져 준 선물인양, 덥석 우리의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그렇게 파고든 일렁임은 쉬 가시지를 않는다. 오름 자락에서 시작되어, 능선을 넘나드는 은빛 물결의 환각에 취해 발을 디디면 어느새 나의 몸은 그 안에서 덩달아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오름에 들어서면 몸이 가볍다. 내가 오름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억새의 물결이 나를 오름으로 올려 보낸다. 파도 위를 타는 서핑처럼, 내 몸은 어느덧 억새의 파도위에 올라가 있고, 그 파도는 내 몸을 들고 오름의 정상으로 옮기고 있다. 오름을 어느 쪽으로 오르든 능선 능선마다 보이는 주위의 풍광을 바라보노라면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아니라는 착각에 빠지고 한다.
따라비오름은 3개의 굼부리가 있고, 그 굼부리를 가운데 두고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봉우리가 서로 떨어짐이 없이 매끄러운 등성이로 연결되어 하나의 오름을 이루고 있다. 북쪽을 향해 말굽형으로 열린 방향의 기슭 쪽에는 크고 작은 이류구들이 보인다. 남쪽의 가시리 쪽에서 보면 밋밋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북쪽에서 보는 따라비오름의 형태는 제주 오름 중에서 단연 으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가을 억새가 한창일 때 보는 따라비오름은 황홀 그 자체이다. 따라비오름은 능선을 따라 탐방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능선을 따라 오름을 돌면 어느 곳에서나 가까이 혹은 멀리 이어지는 오름의 행렬들을 볼 수 있고,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억새 초원과 한라산의 모습도 아련하다.
몸을 가눌 수조차 없이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능선을 따라 정상을 향한다. 돌아가는 방향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억새의 빛깔, 능선의 아름다운 곡선미에 더하여 주위에 펼쳐지는 가을 들녘의 모습에 정신을 뺏겨 마음을 놓으면, 불어오는 바람에 몸 또한 중심을 놓아버린다. 정상 기슭, 바람이 어느 정도 비켜가는 곳에서 잠시 쉬기로 한다. 땀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바람을 거슬러 오르다 보니 허기가 느껴진다. 이럴 때 쯤 먹는 간식은 그 어느 음식보다 맛이 좋다. 떠나고 싶지 않지만 이제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야할 때,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가슴이 아프도록 하얀 물결을 뒤로 하고, 오름 한가운데를 가로 질러 굼부리와 굼부리 사이로 하산 길로 접어든다.
발은 오름을 내려가는데, 눈은 자꾸만 다시 오름을 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