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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

오름 : 서부권

하늬바람이 머물다 가는 곳 ‘영아리오름’

하늬바람이 머물다 가는 곳 ‘영아리오름’

by 제주교차로 2019.12.12

여름철 고온다습한 남동풍이 서서히 방향을 틀어, 차갑고 건조한 북서풍으로 그 이름을 바꾸는 겨울이 오면 오름은 옷을 하나둘 벗고 맨살을 보여준다. 한라산 자락이 그 기세를 몰아 해발 600여 미터까지 내려오면서도 울창한 숲 속에 숨어 맨살을 보여주지 않는 오름 하나를 떨쳐놓는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안덕면 상천리이지만 그 모습은 광평리 쪽에서야 확인할 수 있는 영아리오름이다. 오름의 한쪽사면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바위들과 그 끝에 위치한 마르지 않는다는 습지인 행기물로 유명한 오름이다. 영아리오름의 서쪽 자락에는 하늬복이, 남서쪽 자락에는 마복이, 동쪽 기슭에는 어오름이 기슭자락을 맞대고 있다. ‘하늬’는 ‘서쪽’의 뜻으로 쓰이는 고유어이고, ‘마’는 ‘남쪽’의 뜻으로 쓰이는 고유어이다. ‘복이’는 둥그런 언덕을 뜻하는 말로 보인다. 북쪽에 있는 이돈이오름과는 골프장으로 막혀있다. 광평 너븐드르를 넘어 온 하늬바람이 잠시 머물러 숨 고르고 가는 오름, 영아리오름을 오른다.
예전에는 광평리 마을 쪽 농로를 통해 오름의 북동쪽 기슭의 자그마한 건천을 지나 숲이 우거진 능선을 따라 정상을 올랐지만, 지금은 마보기오름이나 어오름 방향으로 쉽게 오를 수 있다.

핀크스골프장 옆으로 난 마보기오름 탐방로를 따라 마보기오름을 지나면 행기물까지 이어지는 삼나무숲길이 있다. 아니면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안덕위생매립장 동쪽의 임도를 따라 가다 돌오름 방향의 반대쪽으로 가면 오름의 동쪽 기슭으로 오를 수 있다. 입구까지 차를 타고 가면 오름의 높이가 90여 미터에 불과해서 진입로에서 10여분이면 정상 능선에 오를 수 있지만, 안덕위생매립장 입구 쪽에 차를 세우고 호젓한 임도를 따라 걸어가는 운치를 맛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겨울이라 잎을 떨군 나무들로 가득한 입구를 지나 가파른 길을 오르면 얼마 없어 두 갈래로 나누어진 갈림길에 닿는다. 오른쪽으로 가면 정상인 북쪽 봉우리을 만날 수 있고 왼쪽으로 가면 남쪽 봉우리에 닿는다. 북쪽 봉우리를 가는 길은 숲이 우거져 눈에 들어오는 풍광은 없지만 간간이 트인 곳에서는 돌오름 건너 한라산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정상을 지나 서쪽으로 계속 내려가면 커다란 바위 무더기위에 숲을 이룬 낙엽수림과 삼나무조림지를 지나 행기물을 만날 수 있다.
영아리오름은 안덕면 상천리에 위치한 표고 693m, 비고 93m의 오름이다. 완만한 경사의 긴 구릉지 위에 서쪽으로 얕게 패인 말굽형화구를 가지고 남북으로 가로누워 있는 오름이다. 정상인 북봉(693m)과 마주보는 남봉은 동쪽이 평평한 등성마루로 이어졌으나, 서쪽은 처음에는 한 몸이었을 몸체가 골이 팬 채로 갈라져 말굽모양을 하고 있다. 북쪽의 이돈이오름과의 사이에 동서로 계곡이 가로지르고 있다.
이 계곡은 창고천 상류와 광평 근처에서 합류하는데 오름의 서쪽 끝자락에는 행기물(幸器沼)이라는 괸 물이 있다. 옛날 한 주민이 이 물에 행기(놋그릇)가 떠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을 건지려다 빠진 적이 있대서 행기물이라고 불려온다. 예전에는 마르지 않는 물로 알려져 왔는데 지금은 건기에는 물이 마르고 풀들이 자라 그 명성은 옛말이 되어버렸다.

오름 이름의 유래에 대해 한 민속학자에 의하면 “‘영아리’의 ‘영’은 신령스럽다는 뜻이고 ‘아리’는 산(山)이라는 뜻의 만주어(alin)에 대응되는 것으로 영아리란 靈山(신령스런 산)이라는 뜻의 이름이 된다.”고 하였으나, “이런 민속학자의 풀이는 한자어 靈과 만주어 alin이 결합한 것 등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못하므로 신빙성이 없어 보이며, ‘영아리’의 뜻은 확실하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행기물을 지나 다시 동쪽 방향으로 능선을 오르면 커다란 바위무더기 사이로 가파른 길이 나있고 그 길은 남쪽 정상 봉우리로 이어진다. 북쪽이나 남쪽 정상에서 사방으로 트인 풍경을 볼 수는 없지만 오름을 한 바퀴 돌다 보면 군데군데 트인 곳에서 각 방향의 여러 풍경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제주섬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오름군도 보이고, 가까이의 병악에서부터 멀리 군산과 산방산, 형제섬과 송악산 너머 가파도와 마라도도 손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다. 오름 남쪽의 정상부는 풀밭을 이루고 있으나 붉은 송이가 들어나 있고 거대한 바위가 여럿 솟아있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한 쌍의 커다란 바위 너머로 한라산이 들어온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등지고 있는 한라산을 바위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