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화폭 안 그리움의 미학 그리다-화가 이중섭 편
삶의 화폭 안 그리움의 미학 그리다-화가 이중섭 편
by 한지숙 객원기자 2017.05.11
화가 이중섭(1916~1956)은 대표작 ‘소’를 비롯하여 부부, 어린아이, 자연 등 민족정기와 가족애로 충만한 그림들을 남겼다. 그는 제주도에 채 1년도 살지 않았지만 그가 미술사에 남긴 족적만큼이나 제주도에 남긴 예술 흔적도 선명하다.
서귀포시 주변에 위치한 천지연폭포, 정방폭포 등을 둘러보다가 꼭 한 번 들러서 보게 되는 곳이 바로 ‘이중섭 문화거리’와 ‘미술관’이다.
서귀포 정방동에는 당시 이중섭의 거주지를 그대로 재현하여 매일시장 입구부터 솔동산까지 360여 미터를 이중섭거리로 지정하고 미술관을 개관하여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난 그는 사업으로 성공한 외조부 덕에 평양에서 비교적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오산고등학교를 입학하면서 서서히 그림에 입문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소를 그리기 시작했고 일제의 한글말살 정책에 대항하여 한글자모를 풀어 쓴 형태로 그림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는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는데 동경 분카 학원 시절에 훗날 짧지만 운명 같은 사랑을 이룬 일본 여인 야마모토 마사코(한국이름, 이남덕)을 만나게 된다.
이중섭과 결혼을 위해 그녀는 연락선을 타고 홀로 현해탄을 건너 부산에 도착, 1945년 원산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게 된다. 그곳에서 첫 아들을 얻었지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잃게 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는데, 이때부터 이중섭이 그린 그림이 군동화(아이들이 무리지어 노는 그림)를 비롯하여 가족, 아이들이 동물과 함께 등장하는 천진난만한 그림들이 많다.
서귀포시 주변에 위치한 천지연폭포, 정방폭포 등을 둘러보다가 꼭 한 번 들러서 보게 되는 곳이 바로 ‘이중섭 문화거리’와 ‘미술관’이다.
서귀포 정방동에는 당시 이중섭의 거주지를 그대로 재현하여 매일시장 입구부터 솔동산까지 360여 미터를 이중섭거리로 지정하고 미술관을 개관하여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난 그는 사업으로 성공한 외조부 덕에 평양에서 비교적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오산고등학교를 입학하면서 서서히 그림에 입문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소를 그리기 시작했고 일제의 한글말살 정책에 대항하여 한글자모를 풀어 쓴 형태로 그림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는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는데 동경 분카 학원 시절에 훗날 짧지만 운명 같은 사랑을 이룬 일본 여인 야마모토 마사코(한국이름, 이남덕)을 만나게 된다.
이중섭과 결혼을 위해 그녀는 연락선을 타고 홀로 현해탄을 건너 부산에 도착, 1945년 원산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게 된다. 그곳에서 첫 아들을 얻었지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잃게 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는데, 이때부터 이중섭이 그린 그림이 군동화(아이들이 무리지어 노는 그림)를 비롯하여 가족, 아이들이 동물과 함께 등장하는 천진난만한 그림들이 많다.
그러는 사이 다시 두 아이가 태어났고 그에게는 가장 단란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은 그의 가족에게도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피란길에 나서야 했던 그 때 이중섭은 그림도구만은 챙겨야 한다며 붓과 팔레트 등을 챙겨 넣었다고 한다. 그의 가족은 그 때 들고 나온 이중섭의 손때 묻은 팔레트를 2012년 제주도 서귀포 미술관에 기증했다.
그와 가족은 피란길로 부산에 도착해 그때부터 창고와 피란민 수용소를 전전하며 배고픔과 싸워야 했다. 그러다가 제주도가 살기에 조금 낫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1951년, 이중섭과 그의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은 제주도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서귀포에서 1.4평 남짓한 작은 방을 얻어 네 가족이 옹기종기 살았다. 배급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게를 잡아 허기를 달랬지만 전쟁 중에 그래도 가족이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던 제주에서의 생활이었다. 이 시기에 이중섭의 그림에는 ‘게’가 많이 등장하는데 많이 잡아먹은 미안함을 그림에 담았다고 전해진다. 그 외에도 제주도에 살았던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점의 그림을 남겼는데 ‘섶섬이 보이는 풍경’을 비롯하여 ‘서귀포의 환상’ ‘바닷가의 아이들’ ‘게에 물린 아이들’ 등은 제주를 통해서 더욱 풍성하고 생명력 넘치는 그의 그림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녹록치 않았던 제주의 생활을 접고 1952년, 이중섭과 그의 가족은 다시 부산생활을 시작한다. 가난은 여전히 계속되어 아이들이 영양결핍에 시달리고 일본에 살고 있던 장인의 부음까지 듣게 되자 결국 그는 눈물을 머금고 아내와 아이들만 일본으로 보내기로 결심, 이산가족이 되고 만다.
가족이 다 떠나고 홀로 남겨진 그는 떠돌이 생활을 하며 술로 외로움을 달래기도 하고 작품에 전념하기
도 한다. 그림 그릴 화구를 살 수 없는 형편에 이르자 담배 속지에 날카로운 도구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만의 독창성으로 평가되는 ‘은지화’가 되었다.
이 때 아내를 그리워하며 삽화를 잔뜩 그려 넣어 쓴 손편지는 아내와 가족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이 오롯이 묻어나는 편지로 잘 알려져 있다. 헤어진 뒤 1년만인 1953년, 어렵게 일본으로 건너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가족과 상봉하였지만 일주일간의 만남 뒤로 영영 이별이 되고 말았다.
1956년 쓸쓸히 홀로 죽음을 맞이하면서 세상과도 영영 이별을 고했다. 살아생전 홀로 외로움과 가난과 싸우며 치열한 삶을 살았던 그의 비극적 결말은 마음을 먹먹하게 하지만, 그 때문에 탄생된 많은 그의 예술작품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 곁에 생생하게 살아있어 미술관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있다.
그와 가족은 피란길로 부산에 도착해 그때부터 창고와 피란민 수용소를 전전하며 배고픔과 싸워야 했다. 그러다가 제주도가 살기에 조금 낫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1951년, 이중섭과 그의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은 제주도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서귀포에서 1.4평 남짓한 작은 방을 얻어 네 가족이 옹기종기 살았다. 배급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게를 잡아 허기를 달랬지만 전쟁 중에 그래도 가족이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던 제주에서의 생활이었다. 이 시기에 이중섭의 그림에는 ‘게’가 많이 등장하는데 많이 잡아먹은 미안함을 그림에 담았다고 전해진다. 그 외에도 제주도에 살았던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점의 그림을 남겼는데 ‘섶섬이 보이는 풍경’을 비롯하여 ‘서귀포의 환상’ ‘바닷가의 아이들’ ‘게에 물린 아이들’ 등은 제주를 통해서 더욱 풍성하고 생명력 넘치는 그의 그림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녹록치 않았던 제주의 생활을 접고 1952년, 이중섭과 그의 가족은 다시 부산생활을 시작한다. 가난은 여전히 계속되어 아이들이 영양결핍에 시달리고 일본에 살고 있던 장인의 부음까지 듣게 되자 결국 그는 눈물을 머금고 아내와 아이들만 일본으로 보내기로 결심, 이산가족이 되고 만다.
가족이 다 떠나고 홀로 남겨진 그는 떠돌이 생활을 하며 술로 외로움을 달래기도 하고 작품에 전념하기
도 한다. 그림 그릴 화구를 살 수 없는 형편에 이르자 담배 속지에 날카로운 도구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만의 독창성으로 평가되는 ‘은지화’가 되었다.
이 때 아내를 그리워하며 삽화를 잔뜩 그려 넣어 쓴 손편지는 아내와 가족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이 오롯이 묻어나는 편지로 잘 알려져 있다. 헤어진 뒤 1년만인 1953년, 어렵게 일본으로 건너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가족과 상봉하였지만 일주일간의 만남 뒤로 영영 이별이 되고 말았다.
1956년 쓸쓸히 홀로 죽음을 맞이하면서 세상과도 영영 이별을 고했다. 살아생전 홀로 외로움과 가난과 싸우며 치열한 삶을 살았던 그의 비극적 결말은 마음을 먹먹하게 하지만, 그 때문에 탄생된 많은 그의 예술작품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 곁에 생생하게 살아있어 미술관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