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녀 김만덕의 무덤에는 빈 햇살만...
의녀 김만덕의 무덤에는 빈 햇살만...
by young_써비 2008.07.31
고액권 디자인 초상인물로 거론되던 제주의 '의녀 김만덕'이 농협에서 발행하는 농산물 상품권 디자인 인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오만 원 신권의 인물에는 '신사임당'이 차지함으로서 아쉬운 감을 가졌던 사람들에게는 그나마 위로가 되는 소식이다. 이번 추석부터 발행되는 상품권에 초상이 들어간다 하고, 연 1,300만 매의 상품권이 유통된다고 하니 제주의 여성 김만덕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될 듯싶다.
김만덕은 남녀를 통틀어 제주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여자가 제주의 대표인물로 꼽히는 이유에는 제주의 역사에 '영웅'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자가 많은 삼다의 섬에서 여자가 대표인물로 나서는 게 전혀 이상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양가집 자제로 태어났으나 천민으로 살기도 했고, 천민으로 살면서도 천민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버리지 않았고, 조그만 섬 귀퉁이에서 객주집을 했으되 넓은 세상을 볼 줄 알았고, 이름 없는 아녀자로 살았으되 백성을 위할 줄 아는 장부 같은 삶을 살았다. 출륙금지령이 내려진 섬에 여자로 살면서 섬을 벗어나 임금을 알현했고, 천한 직업의 아녀자이면서 고관대작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김만덕은 남녀를 통틀어 제주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여자가 제주의 대표인물로 꼽히는 이유에는 제주의 역사에 '영웅'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자가 많은 삼다의 섬에서 여자가 대표인물로 나서는 게 전혀 이상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양가집 자제로 태어났으나 천민으로 살기도 했고, 천민으로 살면서도 천민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버리지 않았고, 조그만 섬 귀퉁이에서 객주집을 했으되 넓은 세상을 볼 줄 알았고, 이름 없는 아녀자로 살았으되 백성을 위할 줄 아는 장부 같은 삶을 살았다. 출륙금지령이 내려진 섬에 여자로 살면서 섬을 벗어나 임금을 알현했고, 천한 직업의 아녀자이면서 고관대작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임금을 알현하기 위해 상경하던 시기를 제외하면 만덕의 명성에 비해 그녀의 자세한 생애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여자가 천시되던 시대적 이유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김만덕의 영웅화 작업에만 몰두한 나머지 그녀의 생애를 샅샅이 조명하고 행적지를 단장하는 작업에는 소홀한 무신경도 한몫을 했다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의 출생지는 구좌읍 동복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동복리에는 그녀의 출생지를 알리거나 홍보하는 곳은 없다. 아직까지 그녀의 정확한 출생지조차 파악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바닥만한 동네에서 그녀의 출생지를 밝혀내는 것이 어려운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출생지에는 관심이 없는 것일까.
그녀가 거금을 모을 수 있었던 객주터 자리에는 표지석 하나만이 달랑 서있다. 고액권 표지 인물로 내세웠던 위인의 유적치고는 푸대접이 아닐 수 없다.
그녀의 무덤은 사라봉 모충사 내에 있다. 모충사에는 김만덕 기념관과 김만덕 기념탑이 서있는데 만덕의 무덤은 30여 년 전에 화북동 가운이모루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역시나 그녀의 무덤도 그녀의 명성에 비해 놀랄 만큼이나 초라하다.
기념관은 잘 치장되어있고 기념탑은 하늘 높이 솟아 있는데도 그 아래에서 무덤은 흡사 방치된 것처럼 단장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모습으로 있다. 잔디 한 점 없는 무덤에는 솔잎이 떨어져 쌓여 있고 수시로 사람의 발길에 짓밟히는지 생흙이 울퉁불퉁하게 드러나 있다. 지나는 행인에게 이런 요상한 상황에 대해 시위를 벌이는지 무덤가에 서있는 소나무 가지 사이로 내려온 봄 햇살이 무덤가에서 서성이며 뭐라고 중얼거린다. 묘비 앞에 나있는 몇 송이 꽃과 묘비명이 없었다면 과연 만덕의 묘가 맞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빈껍데기인 기념관과 기념탑은 휘황한데 정작 알맹이인 그녀의 출생지와 무덤에는 찬바람만 불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고액권의 초상이나 농협 상품권의 모델은 다 무엇이라 말인가. 우리가 준비하려 했던 것은 그녀의 명성의 확산이 아니라 그녀에게 바치는 후손의 존경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세상에 드러날수록 우리의 부끄러움 또한 드러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그녀의 출생지는 구좌읍 동복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동복리에는 그녀의 출생지를 알리거나 홍보하는 곳은 없다. 아직까지 그녀의 정확한 출생지조차 파악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바닥만한 동네에서 그녀의 출생지를 밝혀내는 것이 어려운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출생지에는 관심이 없는 것일까.
그녀가 거금을 모을 수 있었던 객주터 자리에는 표지석 하나만이 달랑 서있다. 고액권 표지 인물로 내세웠던 위인의 유적치고는 푸대접이 아닐 수 없다.
그녀의 무덤은 사라봉 모충사 내에 있다. 모충사에는 김만덕 기념관과 김만덕 기념탑이 서있는데 만덕의 무덤은 30여 년 전에 화북동 가운이모루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역시나 그녀의 무덤도 그녀의 명성에 비해 놀랄 만큼이나 초라하다.
기념관은 잘 치장되어있고 기념탑은 하늘 높이 솟아 있는데도 그 아래에서 무덤은 흡사 방치된 것처럼 단장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모습으로 있다. 잔디 한 점 없는 무덤에는 솔잎이 떨어져 쌓여 있고 수시로 사람의 발길에 짓밟히는지 생흙이 울퉁불퉁하게 드러나 있다. 지나는 행인에게 이런 요상한 상황에 대해 시위를 벌이는지 무덤가에 서있는 소나무 가지 사이로 내려온 봄 햇살이 무덤가에서 서성이며 뭐라고 중얼거린다. 묘비 앞에 나있는 몇 송이 꽃과 묘비명이 없었다면 과연 만덕의 묘가 맞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빈껍데기인 기념관과 기념탑은 휘황한데 정작 알맹이인 그녀의 출생지와 무덤에는 찬바람만 불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고액권의 초상이나 농협 상품권의 모델은 다 무엇이라 말인가. 우리가 준비하려 했던 것은 그녀의 명성의 확산이 아니라 그녀에게 바치는 후손의 존경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세상에 드러날수록 우리의 부끄러움 또한 드러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