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황홀경에 머물다-사진작가 김영갑 편
제주의 황홀경에 머물다-사진작가 김영갑 편
by 한지숙 자유기고가 2017.03.23
제주의 황홀경에 머물다 사진작가 김영갑
제주공항을 나와 성산포가 있는 오른쪽해안을 따라 돌다보면 삼달교차로 부근 소담한 정원을 가진 갤러리 하나가 나온다. ‘두모악’, 한라산의 옛이름을 가진 이 갤러리는 제주를 가장 아름답게 담아냈다는 사진작가 김영갑의 작품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관광지로서의 제주가 아닌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의 제주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진들로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진 제주는 지금도 많은 이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지만 우연히 제주를 찾았던 26살 청년 김영갑의 눈에도 자신의 모든 것과 바꿀 수 있을 만큼 강렬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제주를 다녀간 지 2년 후인 1985년, 결국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뭍에 그대로 남겨두고, 홀로 제주로 내려왔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진 제주는 지금도 많은 이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지만 우연히 제주를 찾았던 26살 청년 김영갑의 눈에도 자신의 모든 것과 바꿀 수 있을 만큼 강렬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제주를 다녀간 지 2년 후인 1985년, 결국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뭍에 그대로 남겨두고, 홀로 제주로 내려왔다.
사실 그때까지 김영갑은 사진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었다. 한양공고를 졸업한 그에게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형이 선물로 카메라를 주면서 카메라와 인연을 맺게 됐다. 그는 친구의 아버지 사진관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어깨너머로 사진을 배웠다.
이후 고향을 떠나 전국을 떠돌며 사진을 찍으러 다니다 제주에 닻을 내렸다. 그 후로 그의 카메라 앵글엔 오로지 제주만이 담겼다. 속세를 떠난 야인처럼 자신은 돌보지 않은 채 카메라를 들고 홀린 듯 제주를 누비며 한라산 중산간의 오름과 그 너머의 바다, 섬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제주에 머물며 그 안의신비로움을 목도 할수록 그 순간을 붙잡기 위해 더더욱 사진 작업에 매달렸다.
척박한 제주의 땅처럼 그의 삶도 거칠고 팍팍했다. 심하게 주렸지만 라면은 호사였고 차가운 겨울방에 누워도 전기장판은 사치였다. 막일과 허드렛일을 가리지 않았지만 그는 사진을 팔지는 않았다. 사진 청탁도 거절했다. 원하는 사진만을 찍기 위해 그리했다.
유난히 제주의 바람을 좋아한 김영갑은 용눈이오름과 마라도를 그의 사진인생 통틀어 베스트 촬영지로 꼽았다. 하늘 아래로 자유롭게 유영하는 바람의 움직임을 바라볼 수 있는 그곳에서 움막을 치고 보름 이상을 기다려 억새와 바람이 만나는 절정의 순간을 촬영했다. 돌연히 나타났다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순간의 황홀’을 쫓아 어디든 가고, 또 기다리던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고 가히 과한 말도 아니었다.
제주에 내려온 지 꼭 20년이 되던 해 49세의 김영갑은 자신이 사랑하던 제주의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제주 땅에 묻혔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손가락에 힘이 쥐어지지 않아 병원을 찾은 그에게 이미 치명적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은 뉴욕양키스의 전설의 4번 타자 루게릭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병, 대뇌와 척수의 운동신경 세포가 파괴되어 근육이 점점 힘을 잃어가는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3년이 채 되지 않을 거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세상의 욕심 없이 사진에만 몰두해온 자신의 삶인데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원망도 하고 한탄도 했지만 거기 그대로 주저앉지는 않았다. 폐교가 된 삼달리의 한 초등학교 건물을 얻어 아픈 몸을 이끌고 지금의 갤러리를 손수 꾸몄다. 그의 14번째의 전시회가 열렸던 2005년 봄, 제주를 지독히도 짝사랑한 사진작가 김영갑은 세상을 떠났고 ‘두모악’ 감나무 아래 뿌려졌다.
이후 고향을 떠나 전국을 떠돌며 사진을 찍으러 다니다 제주에 닻을 내렸다. 그 후로 그의 카메라 앵글엔 오로지 제주만이 담겼다. 속세를 떠난 야인처럼 자신은 돌보지 않은 채 카메라를 들고 홀린 듯 제주를 누비며 한라산 중산간의 오름과 그 너머의 바다, 섬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제주에 머물며 그 안의신비로움을 목도 할수록 그 순간을 붙잡기 위해 더더욱 사진 작업에 매달렸다.
척박한 제주의 땅처럼 그의 삶도 거칠고 팍팍했다. 심하게 주렸지만 라면은 호사였고 차가운 겨울방에 누워도 전기장판은 사치였다. 막일과 허드렛일을 가리지 않았지만 그는 사진을 팔지는 않았다. 사진 청탁도 거절했다. 원하는 사진만을 찍기 위해 그리했다.
유난히 제주의 바람을 좋아한 김영갑은 용눈이오름과 마라도를 그의 사진인생 통틀어 베스트 촬영지로 꼽았다. 하늘 아래로 자유롭게 유영하는 바람의 움직임을 바라볼 수 있는 그곳에서 움막을 치고 보름 이상을 기다려 억새와 바람이 만나는 절정의 순간을 촬영했다. 돌연히 나타났다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순간의 황홀’을 쫓아 어디든 가고, 또 기다리던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고 가히 과한 말도 아니었다.
제주에 내려온 지 꼭 20년이 되던 해 49세의 김영갑은 자신이 사랑하던 제주의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제주 땅에 묻혔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손가락에 힘이 쥐어지지 않아 병원을 찾은 그에게 이미 치명적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은 뉴욕양키스의 전설의 4번 타자 루게릭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병, 대뇌와 척수의 운동신경 세포가 파괴되어 근육이 점점 힘을 잃어가는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3년이 채 되지 않을 거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세상의 욕심 없이 사진에만 몰두해온 자신의 삶인데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원망도 하고 한탄도 했지만 거기 그대로 주저앉지는 않았다. 폐교가 된 삼달리의 한 초등학교 건물을 얻어 아픈 몸을 이끌고 지금의 갤러리를 손수 꾸몄다. 그의 14번째의 전시회가 열렸던 2005년 봄, 제주를 지독히도 짝사랑한 사진작가 김영갑은 세상을 떠났고 ‘두모악’ 감나무 아래 뿌려졌다.
자신의 에세이집 《그 섬에 내가 있었네》에 김영갑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사진에 붙잡아두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들판의 빛과 바람, 구름, 비, 안개이다. 최고로 황홀한 순간은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삽시간의 황홀이다.”
청춘을 다 바쳐 그가 잡아두려 했던 제주의 빛나는 순간들, ‘삽시간의 황홀’은 그가 남긴 수많은 사진을 통해, 그리고 제주 속 또 하나의 황홀경이 된 그의 삶, 사진 이야기를 통해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내가 사진에 붙잡아두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들판의 빛과 바람, 구름, 비, 안개이다. 최고로 황홀한 순간은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삽시간의 황홀이다.”
청춘을 다 바쳐 그가 잡아두려 했던 제주의 빛나는 순간들, ‘삽시간의 황홀’은 그가 남긴 수많은 사진을 통해, 그리고 제주 속 또 하나의 황홀경이 된 그의 삶, 사진 이야기를 통해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