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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in&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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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현존 최고(最古) 현판 문필가 '고득종'

제주 현존 최고(最古) 현판 문필가 '고득종'

by 한지숙 자유기고가 2017.05.25

제주 현존 최고(最古) 현판 문필가 문인 고득종
‘땅이 다함에 창망한 바다와 연하였고, 마루 창을 여니 푸른 산과 마주 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전해져 오는 고득종(1388~1460)의 시문이다. 조선초기 문신 고득종은 자는 자부, 호는 영곡, 본관은 제주로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에서 고봉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효행이 지극하여 부모의 3년 상(喪)을 치룬 공덕이 전해지면서 1413년 조정에서는 그에게 ‘생원’이라는 벼슬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에는 ‘그의 성품은 지성으로 효도하며 문장과 필법이 고상하고 기품과 절조가 뚜렷하여 평장사(平章事)의 문풍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생원이 된 이듬해 계속 학문에 정진, 1414년 알성 문과에 급제하여 대호군, 예빈시판관 등을 지냈고 후에 예조참의, 중추원동지사, 한성판윤 등의 높은 벼슬을 지냈다.

그가 쓴 글씨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제주목 건물의하나인 ‘홍화각(弘化閣)’ 현판이다. 현존하는 국내 현판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국보1호 숭례문 현판보다 30여 년 앞선다고 알려졌다. 현판 속 서체는 조선 초기에 유행하던 것으로 세종16년 갑인자 금속활자의 서체와 동일이다. 현판은 거의 원형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조선시대 초기 현판의 서체와 제작기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013년에는 문화재로 등록되어 제주시 삼성혈 경내에 보관되고 현재 내걸린 현판은 탁본해서 새긴 것이다.

내용이 판각에 새겨져 있는 ‘홍화각기(弘化閣記)’는 세종 17년에 고득종이 지은 유명한 문장이다.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홍화각기’는 이원진의 「탐라지」에도 전해져 오는데 홍화각의 규모와 이름의 유래를 알 수 있는 대목도 있다.

‘관영이 불에 타자 주거할 곳이 없음을 탄식하고… 집을 짓고 그 집 수는 206간이며… 민정에 통달함으로서 마음을 삼으면 주나라의 선정을 볼 수 있을 것이며, 제주도민은 마땅히 복 받을지어다. 그러한즉 어찌 홍와(弘化)로써 이 각(閣)을 이름 하지 않으리오’

많은 경험과 여행을 통해 자연을 예찬하며 넘치는 감흥을 시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고득종은 여러 곳에서 그의 예술적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한양과 충청도 등 여정 중에는 영암군에 들러 한 누정에 올라 ‘한 소리 우는 경쇠는 구름 가운데 절에서 나오고, 두어 줄기 불 때는 연기는 대나무 밖의 집에서 나는도다’라며 시로 표현했고, 해남현 객관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는 망운루에 올라서는 ‘마음은 태양 아래에 달리니 삼산이 멀고 눈은 하늘가를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떠 있도다’ 자연을 예찬하며 가는 곳 마다 정서를 표출한 시문을 남기곤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거닐었던 무릉도원의 모습을 듣고 안견이 3일 동안 그린 것으로 유명한 「몽유도원도」는 그림의 감흥을 자신의 필적으로 직접 화답한 21명의 문사들이 있는데 고득종도 그 중 한 명이다. ‘몽유도원도찬양 칠언장편시」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역대 서화가들을 기록한 책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보면 ‘그는 수문전의 제학을 맡았으니 문필이 모두 옛 법에 가까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문전이란 왕에게 강의를 하던 곳으로 제학은 정3품 정도의 벼슬을 의미한다. 특히 세종20년에는 그가 호조참의로 있을 때 명나라에 다녀왔고, 1439년에는 통신사의 임무로 일본왕 서계를 가지고 돌아오는 등 외교통으로서의 활약을 하기도 했다. 많은 지역을 다니며 활약을 했지만 특히 제주도민에게 있어서 그는 특별하다.
제주의 토지 등급을 내려주도록 조정에 요청하여 조세부담을 덜어주려 애썼고, 한라산 기슭 4면에 목장을 축조하여 소위 제주도 목장이 지금의 10소장으로 나뉘게 되는 시초가 되었다.
또한 참역폐단을 시정하고 한양으로 올라가 종사하는 제주 출신의 자제들을 위하여 직료(職料)를 설치하고 경제적 지원을 하기도 했다.

유배를 당하는 등 질곡을 겪기도 했지만 이렇듯 제주를 아꼈던 그의 정책과 효에 감명을 받아 제주도민들 역시 그를 부형으로 여겼고 오늘날 추앙받는 인물 중의 한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