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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이야기

이주민이야기 : 소소한 제주 이야기

반짝하고 존재감을 알리는 청귤

반짝하고 존재감을 알리는 청귤

by 라라 여행작가 2019.09.20

제주는 봄이 오면 마을 곳곳 귤나무 꽃이 피어 그 귤꽃 내음이 여기저기에서 기분 좋게 바람에 날아와 마을은 마치 향수라도 뿌려 둔 것처럼 은은하고 향기롭다. 추석이 끝나고 본격적인 가을이 시작되었다. 하늘은 더없이 높고 청명하다. 이맘때는 청귤이 잠시 나오는 짧은 시기. 언제부터인가 청귤을 가지고 청을 담그는 일은 일 년에 한 번쯤은 꼭 하는 일이 되었다.
레몬보다 천연 비타민C가 열 배나 풍부하다는 청귤. 올해도 어김없이 유기농 농법으로 귤 농사를 짓는 청년 농부 한림읍의 조군이 청귤을 한 박스 들고 나타났다. 유기농 청귤이라 완벽하게 매끈하거나 예쁘진 않지만 모든 계절의 비와 바람과 햇빛을 머금은 그의 투박한 풋귤은 귀하고 싱그럽다.
설탕을 일 대 일 비율로 부어주어 만들어 두는 청귤은 이듬해 다시 청귤이 나오는 시기까지 약 1년 정도는 두고두고 먹는 것 같다. 깨끗이 씻어 얇게 칼로 자를 때면 청귤즙이 묻은 내 손을 비롯해 부엌에는 내가 좋아하는 시트러스 향이 가득 넘쳐나서 그저 청귤청을 만드는 행위만으로 나는 꽤 행복해진다.
집에 있는 병을 꺼내 물을 붓고 자작하게 병 소독을 마치고 말려서는 달콤 새콤한 청귤청을 가득 담는다. 이따금 친구에게도 주고, 육지에 계신 엄마에게도 보내고, 마을 친한 분들께도 한 병 주고, 달빛창가302호에 찾아오는 나의 게스트들에게도 한 잔 내어주는 제주산 청귤.
여름에는 어름을 넣고 탄산수를 부어 시원하게 한 잔, 겨울에는 마당에서 로즈마리를 조금 꺾어와 따뜻한 물 부어 한잔하면 그 그윽한 향이 집안으로 퍼진다. 몇 알 남은 청귤은 냉장 보관하며 생선구이나 샐러드 데코도 하고, 칵테일을 만들 때 활용하기도 한다.

푸릇한 풋귤이 우리에게 맛있는 차가 되어 주고 또 이 시기를 지나 잘 익은 노란색의 감귤이 되는 겨울철이면 난로에 모여 앉아 우리는 귤을 까먹으며 수다를 떨겠지. 동네 곳곳의 귤 나무에서 노랑의 귤들이 주렁주렁 풍성하게 달려 있을 때 그저 그 풍경만으로 아름답고 이국적이다.
귤이 있는 이 풍경이 가장 제주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싶다.제주에 살면서 매 계절, 매시간 지천의 먹을 것을 따고 심고 정리해서 늘 바쁘지만 비로소 행복하다. 다소 긴 시간이 걸리지만 직접 만들고 다듬으며 만들어내는 그 과정은 진정한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푸드다. 반짝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푸릇푸릇 싱그러운 청귤 출하 시기, 올해도 어김없이 청을 담그면서 휘파람을 분다.
여행작가, 라라
(애월에서 소규모숙소<달빛창가302호>를 운영, 여행서 <연애하듯 여행>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