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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이야기

이주민이야기 : 제주에세이

영등할망, 제주를 아직 못 떠났나

영등할망, 제주를 아직 못 떠났나

by 이미경 객원기자 2017.05.04

일 년여 만에 다시 찾은 제주.

화창한 봄을 기대했는데 낭패다. 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쓴 채 종종걸음으로 귀덕리 숙소에 도착했다. 그날 밤부터 무시무시한 바람소리와 함께 후두둑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비는 이틀 동안 내리다 그치다를 반복하며 아주 잠깐씩 해가 비추기도 했다. 비가 완전히 그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동네라도 한 바퀴 휘 돌아봐야겠다 싶어 비가 잠시 멎은 틈에 숙소를 나섰다.

귀덕리는 근처 애월처럼 요즘 한창 뜨고 있는 관광지는 아니었기에 조용히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물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바람이 귓가에서 웅웅 뭐라뭐라 조잘거리지만 소란스럽진 않다. 그렇게 바람과 함께 산책하다 영등할망을 만났다.

영등할망은 1만 8천 빛깔의 바람을 움직이는 바람의 신이다. 그러니까 이 영등할망이 봄을 만들기 위해 바람과 꽃씨를 갖고 제주를 찾아오는데, 맨 처음 도착하는 곳이 바로 귀덕리란다. 영등할망 조각상을 자세히 보니 왼손 아래에 복주머니처럼 바람 주머니가 걸려 있다.

영등할망 양옆으로는 영등하르방과 영등대왕이 서 있다. 이들 모두 세상의 북쪽 끝 영등나라에 살고 있는 신들로, 영등하르방은 바람의 씨를 만드는 신이다. 영등할망이 제주에 갈 때 바람의 씨와 함께 오곡 씨앗, 봄 꽃씨를 주머니에 담아준다고 한다. 영등대왕은 영등할망이 제주에 바람을 뿌리는 동안 영등 나라를 지키는데, 춥고 어두운 곳에서 홀로 반짝이며 영등나라를 지키고 있다 해서 ‘외눈박이 나라의 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영등할망이 딸이나 며느리를 데리고 올 때도 있는데, 애지중지 딸을 데려올 때는 바람도 빨리 거두고 가서 봄도 빨리 오지만, 며느리를 데려올 때는 영등할망의 변덕이 죽 끓듯 해서 날씨도 변덕스럽다고 한다. 하지만 며느리는 시어머니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며 바다에 전복, 소라, 미역 등의 해초 씨를 뿌리고 간다. 며느리까지 심술궂었으면 큰일날 뻔했다. 예로부터 고된 시집살이하는 며느리를 후덕하고 심성 착한 캐릭터로 만들어 신화에 투영한 듯하다.

이밖에도 영등좌수, 영등별감, 영등호장, 영등우장 같은 영등신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듯 각자 개성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제주도에 바람만 많은 줄 알았지, 이렇게 재미있는 영등신들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새삼 제주가 신화의 땅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다시 비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날씨가 이리 변덕스러운 걸 보니 영등할망이 올해는 며느리를 데리고 온 모양이다. 그런데 가만, 영등할망은 음력 2월 초하루에 귀덕리 복덕개 포구로 들어와 한라산 오백장군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고 돌아다니다가 2월 15일에 우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를 떠난다고 했다. 그렇다면 영등할망은 떠난 지 며칠이 지난 때였다. 하지만 나는 영등할망이 아직 제주를 떠나지 못한 게 틀림없다고 상상했다. 영등할망이 바람 주머니를 잃어버려 그것을 찾느라 늦장이거나, 아니면 착하디착한 며느리가 다시 영등나라에 가서 변덕 많은 시어머니 비위 맞출 것이 아득해서 다니던 길이 아닌 다른 바람길로 들어섰고 영등할망이 며느리를 찾느라 제 날에 가지 못한 것이다, 하고 말이다.

제주를 사랑하는 동화작가 이미경
-머릿속이 뒤죽박죽 될때마다 제주에 머리를 씻고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