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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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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파치 귤을 먹는 이유

매일 파치 귤을 먹는 이유

by 이현진 객원기자 2017.12.21

육지에서 갑작스레 직장을 버리고 제주도로 이주를 결심했을 때, 지인들은 한라봉 농장주와 결혼이라도 하는 거냐고 물었다. 이 섬에 아무 연고도 없던 그때는 웃어 넘겼다. 그로부터 2년 후. 비록 한라봉은 아니지만, 농장주도 아니지만, 귤농사를 짓는 남자와 어쩌다 보니 진짜 결혼을 했다.

그래서 나 역시 귤 밭의 노동자가 되었다. 연애 초반에는 귤 밭 옆에 파라솔을 펴고 독서나 하고 있으라 더니, 남편은 이제 나에게 귤 가위를 쥐여준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사무직만 해온 내가 밭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제주는 귤 수확철인 12월에 가장 바쁘다는 것도 밭에 발을 들이면서 알게 된 초짜 일꾼이다.

아무리 제주가 육지보다 따뜻하다지만, 내내 밖에서 바람 맞으며 귤을 따고 온 첫날은 힘들었다. 곡소리를 하며 침대에 누웠다가 다음날도 곡소리를 하며 겨우 일어났다. 귤이라면 손바닥이 노래지도록 먹을 줄만 알았는데, 손바닥에 굳은 살이 박이도록 따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게 묘한 중독성이 있어서 귤을 따고 온 날 밤에는 천장에서 귤이 내려오고, 손은 허공에서 가위질을 하고 있다. 특히 귤의 꼭지를 자를 때 '싹둑'하는 그 경쾌한 소리는 빨리 다음 것을 또 자르고 싶어 눈이 벌개지게 만든다.
사실 난 나뭇가지에 스치기라도 하면 뭐가 묻었을까 진저리 칠 정도로 결벽증을 앓고 있었다. 이제 온갖 벌레들과 새 깃털을 헤집으며 요새 같은 나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물론 흥미도와 실력은 꼭 정비례하지 않기에 남편에게 잔소리도 많이 들었다. 초반에는 '가위빵(가위로 귤에 상처를 내는 것)'이나 떨어트리는 일이 잦았다. 그 단계를 넘어서니 빠른 '선과'가 힘들었다. 너무 크거나 작은 귤, 마른 귤, 딱딱한 귤, 새가 파먹은 귤, 곯은 귤 등 파치를 컨테이너에 담으면 여지없이 매의 눈이 골라내곤 했다. 이를 어려워하는 내게 남편이 아주 쉬운 지침을 제시해주었다.

"이거 너 같으면 먹고 싶겠니?"

그래, 내가 먹고 싶은 귤을 따면 된다. 마음은 이해하고 있지만, 문제는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 것이다. 귤에만 집중하다 보면 '귤아일체' '귤심전심'이 되는데, 바람 불고 새가 쪼고 잡초가 타고 오르는 힘든 조건 속에서 주렁주렁 잘도 매달려 주황빛으로 익어있는 모습을 보면 하나하나가 안쓰럽고 대견하다. 그래서 자꾸만 '너도 가자' '너도 담자'며 땅으로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게 ‘농심’일까, 감히 생각했다. 마음 약한 초보 알바생인 덕분에, 요즘 집에서 매일 파치 귤로 배를 채우고 있다는 게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