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이미지

이주민이야기

이주민이야기

남의 밭에 들어가지 않는 예의

남의 밭에 들어가지 않는 예의

by 이현진 객원기자 2018.01.11

서귀포의 어느 관광지에 갔을 때였다. 대형버스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더니 주변을 둘러보다가 귤 밭을 발견했다. 시기상 파치들을 따서 나무 아래로 떨어뜨려 놓았는데 그걸 본 누군가가 먼저 서슴지 않고 돌담을 넘어 귤 밭으로 들어갔다. 그 사람은 노다지라도 캐는 듯이 떨어진 귤을 한아름씩 주워 담 밖에 있는 일행들에게 건넸다. 그걸로 부족했는지 몇 사람이 더 담을 넘어와 귤을 챙겨갔다. 공짜로 귤을 얻은 사람들은 얼마나 신이 나는지 뒤에서 우리 차가 오는데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제 출발할 테니 빨리 버스에 타라는 재촉이 아쉬운지 웃음 반 울상 반이 되어 귤 밭을 힘겹게 떠났다.

“아니, 저렇게 남의 밭에 막 들어가면 어떡해?”

부업으로 귤 농사를 짓는 남편이 역시나 한 소리 했다. 그 사람들 편을 드는 건 아니었지만 멀쩡한 귤을 따는 것도 아니고 땅에 떨어진 걸 주워가는데 뭐 어떤가, 그런 생각을 잠시 했다. 아마 그 관광객들도 그런 가벼운 마음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저건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야.” 남편이 한마디 더 보탰다.

언젠가 TV 다큐 프로그램에서 제주도 해안가 마을이 나온 적 있는데 비슷한 경우를 봤다. 바닷가에서 놀던 관광객이 한데 모아져 있는 소라며 성게를 아무렇지 않게 챙기다가 노발대발한 해녀 할망한테 딱 걸린 장면이었다. 말하자면 그곳은 물질 해온 것들을 모아둔 바다의 밭인 모양이었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제주도에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맞은 첫 겨울에 동네 밭에 버려져 있던 무를 어머니와 함께 주워다가 깍두기를 담가 먹었다. 무를 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공짜로 얻었다는 희열에 눈이 벌개져서 또 버려진 무가 없는지 찾곤 했다. 물론 수확 후 남은 파치들이라는 걸 확인하긴 했지만, 남의 밭이라는 조심스러움은 부족했던 것 같다.
겨울에는 귤이 손 뻗으면 충분히 딸 수 있는 곳에 주렁주렁 매달려있고, 당근이며 감자며 무들이 밭에 널려있으니 너무 쉽게 생각한 게 사실이다. ‘이런 게 시골 사는 묘미’라며 일방적인 낭만에 젖었나 보다. 설사 그게 상품성이 없어 버린 것이라도, 엄연한 남의 밭을 침범해 허락 없이 가져가는 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아마 내가, 그리고 그때 그들이 농사를 한 번이라도 지어봤다면 그렇게 함부로 누군가의 수확에 손을 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귤 많은 제주에 왔는데 이 정도쯤이야 여행의 추억이라 포장하지 말고, 기본적으로 남의 밭에 들어가지 않는 게 예의라는 걸 먼저 알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