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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을 아십니까?’

‘제주 4·3을 아십니까?’

by 제주교차로 2018.03.29

4·3 70주년, 여전히 4·3은 진행 중이다.
제주 4·3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현재 제주도는 세계인들이 찾는 최고의 관광지로 유명한 아름다운 섬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아름다운 섬에는 오랫동안 말하지 못한 아픈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 온 사람이든, 타 지역에서 제주도로 와 오랫동안 살아 온 사람이든 관심이 없으면 알 수가 없었던 아픈 역사다.

이에 제주 4·3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고자 한다. 제주 4·3은 도대체 어떤 사건이며, 왜 일어난 것일까?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2003.12)에서는 4·3을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을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 정의하고 있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서 밝혔듯 4·3의 시작은 1947년 3월 1일이다. ‘4·3’은 그날부터 1954년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의 과정 전체를 아우르는 기호일 뿐이다.

1947년 3월 1일 제주시에서 3만여 명이 제28주년 3·1절 기념 대회를 열었다. 읍면 지역까지 포함해 당시 인구의 1/5인 5만 명이 모였다. 이는 일본에게서 해방 후에도 궁핍이 이어지는 가운데 1946년 대흉년에 미군정의 미곡 수집령으로 불만이 쌓였고, 친일경찰까지 재등용해 불신이 커졌다. 3·1 대회는 이에 대한 항의였고,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고 싶은 열망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3·1 시위 도중 경찰의 말발굽에 아이가 치여 넘어지고 이에 항의하는 군중을 향해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이 총을 발사해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을 당하는 일이 터진다. 이에 미군정 경찰은 비무장 시위대에 총을 쏜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시위자 일제 검거에 나섰다. 이에 도민들은 3월 10일 학교, 관공서, 상점 등 4만 명이 넘게 참여한 민관 총파업으로 항의를 했지만,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은 경찰의 발포를 정당방위라 주장하며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해 더욱 강하게 탄압했다. 그 후 제주도지사도 극우성향의 육지인으로 교체됐고, 서북청년회가 공갈과 폭력을 일삼았다. 1년 사이 2,500여 명이 검거되고 3명의 청년이 경찰의 고문으로 죽었다. 이처럼 지속된 탄압은 이듬해 4월 3일의 봉기로 이어졌다.

당시 봉기세력과 제주도민들은 탄압을 중단하라는 요구와 함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 결사반대”를 외쳤다.(이 무렵 미군정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고자 5·10총선거를 추진) 결국 제주도에서는 선거를 피해 도민들이 대거 입산해 버리면서 정국에서 유일하게 3개의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무산된다. 이에 미군정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정부는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강경진압에 나섰다.

무장봉기라 하지만 제주도 전역에서 300여 명이 일제 99식 총 30여 정과 죽창을 든 게 전부였다. 국방경비대와 무장대 사이의 협상으로 평화적으로 해결될 기회도 있었지만, 미군정은 강경 진압했다. 특히 1948년 10월 송요찬 9연대장이 해안에서 5km 이상 지역 통행금지와 무조건 발포 명령을 내리고, 11월 이승만의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초토화작전’이 본격화된다. 그로부터 이듬해 봄까지 끔찍한 대량학살이 무차별로 행해지고, 중산간 마을은 불타 없어지고 많은 이들이 죽거나 산으로 피신해야 했다. 이 당시 3만 여 명이 희생됐고, 공식 확인된 희생자가 15,000명으로 이 중에는 어린이와 노인이 12%에 이를 만큼 아주 무차별한 학살이 행해졌다.

이후 반세기 동안 4·3은 금기의 역사였다. 희생자들은 ‘빨갱이’ 누명을 쓰고 유족들은 숨죽여 울어야 했다. 살던 마을은 불타 사라지고 공동체는 무너졌다. 민주화의 열기로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4·3의 진실은 참혹함 그 자체였다.

2000년에는 50주년을 맞아 4·3 특별법이 제정되고, 2008년 평화공원이 세워지고, 2014년 국가 추념일로 지정됐다. 그러나 아직도 4·3은 편히 잠들지 못한다.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가해자들은 ‘국가유공자’ 대우를 받고 있다.

4·3 희생자들의 원혼과 유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인권, 평화, 통일의 나라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전후 세계질서가 냉전체제로 재편되고 민족이 분단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가장 큰 고통을 당했던 아픔의 섬 제주도는 미-중 간의 신냉전이 시작되고 있는 오늘날 또다시 그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평화의 보루, 진정한 ‘세계 평화의 섬’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18년 4월 3일, 올해는 4·3이 발생한 지 70년이 되는 해로 그 어느 때보다 ‘4·3 바로 알기’에 적극적이다. 제주 안팎에서는 4·3과 관련된 음악회와 연극 공연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또한 ‘이등병의 편지’와 ‘가을 우체국 앞에서’의 원곡자로 알려진 가수겸 작곡가 김현성이 제주 4·3 항쟁 70주년을 기념하는 음원 ‘안부-펜안하우꽈’를 발표했으며, 가수 안치환또 ‘4월 동백’이란 신곡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