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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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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 11코스]제주의 보물숲, 곶자왈의 숨소리를 듣다

[올레 11코스]제주의 보물숲, 곶자왈의 숨소리를 듣다

by 이미경 객원기자 2018.01.25

모슬포의 푸른 바닷빛이 초록의 마늘, 양배추밭으로 서서히 변해갈 즈음 모슬봉 둘레길에 들어선다. 올레 11코스는 탄생과 삶, 생존, 소멸이 녹아 있는 길이다. 모슬봉 오르는 길 내내 소멸된 존재의 흔적과 마주친다. 이 지역 최대의 공동묘지가 모슬봉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4·3 항쟁과 6·25 전쟁으로 희생된 분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무덤 너머로 가파도가 가느다랗게 눈에 잡힌다. 드넓은 벌판이 하늘과 맞닿아 지평선을 이루고, 둥근 산방산과 뾰족 단산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흙으로 돌아간 이들의 영혼을 위로라도 하듯 모슬봉은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끌어안고 있나 보다.
모슬봉을 내려와 꼬불꼬불 밭길 사이를 지나 정난주 마리아의 묘가 있는 대정성지로 향한다. 정난주 마리아는 신유박해 때 백서 사건으로 처형된 황사영의 부인으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는데, 유배길에 두 살 난 아들을 살리기 위해 추자도에 내려두고 떠났다고 한다.
이후 생이별을 한 아들을 가슴에 묻고 37년간 귀양살이를 하다 숨을 거두었다. 기구한 운명 속에서 묵묵히 삶을 지켜온 이의 안식을 빌며 묘소를 나선다.

길은 다시 이어지고 이윽고 11코스의 하이라이트 신평 곶자왈에 다다른다. 곶자왈은 수풀을 뜻하는 ‘곶’과 자갈, 바위 같은 돌을 뜻하는 ‘자왈’을 일컫는 말로, 나무와 덩굴, 바위 등이 마구 뒤섞인 숲이다.
곶자왈에 들어서는 순간 시간이 정지된 듯 신비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도 그럴 것이 각종 나무와 덩굴이 빽빽이 들어차 있어 위를 올려다봐도 하늘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방이 음습하고 어두컴컴하다. 그래서 흐린 날은 피하는 게 좋다. 그나마 햇빛 쨍쨍한 날이어야 사이사이 밝은 빛이 들어와 조금 안심하며 걸을 수 있다.
곶자왈은 용암이 바위로 부서져 형성된 곳이기에 옛날부터 척박한 땅으로 내버려져 경작을 할 수 없어 땔감을 대기 위한 공간으로만 이용되었다. 그 때문인지 곶자왈의 나무들은 보통 숲의 나무와 사뭇 달랐다. 유난히 종가시나무가 많았는데, 나무뿌리가 땅위로 그대로 드러난 채 뿌리에서 여러 줄기가 한꺼번에 나와 자라고 있었다. 언제 베어질지 모르는 운명에 적응하며 생존하기 위해 진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평과 무릉 경계 즈음,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땅을 일궈 살았다는 정개왓을 지나 용암이 파도물결처럼 흘러 넓게 돌이 박혀 있는 웃빌레질에 발을 대어본다.
곶자왈을 걷는 동안 돌과 돌 사이에 난 숨골을 종종 볼 수 있다. 이 숨골에서 일정한 온도의 바람이 나온다. 그 덕에 북방한계식물과 남방한계식물이 함께 자라는 숲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한겨울인데도 나무뿌리 한 귀퉁이에서 솜털을 뒤집어쓰고 있는 민들레 씨앗이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탄생과 생존의 삶, 그리고 죽음의 길을 지나 생명과 소멸이 다시 반복되는 곶자왈을 벗어나니 무릉리다. 자연스레 무릉도원이 연상된다. 인생의 모든 길을 걷고 나면 무릉도원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